작년에 이어 두 번째 회고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브런치는 아니지만 SNS나 개인 블로그에 짧은 글을 쓰긴 했다. 긴 호흡의 글은 오랜만이라 노트북을 켜고 글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조금 어색하다. 최근에 읽었던 <일의 철학>에선 매일 배운 점, 시작한 점, 도와준 점 세 가지를 기록하기를 추천했다. 여기에 영감을 받아 2021년 회고는 배운 점, 시작한 점, 도와준 점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첫 정규직으로 프로덕트 매니저 커리어를 시작했다. 작은 규모의 회사에 유일한 PM이라 좋은 말로 이것저것 다 해볼 수 있었고, 나쁜 말로 모호한 역할로 인한 반쪽자리 일만 해왔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제대로 일하는 게 맞나?" 일을 하면서도 어설픈 모습이 아른거렸고 잘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이 시기에 나는 정석이 있는 프로세스를 꿈꾸었고 이를 배우기 위해 주니어 PM을 위한 모임, 강의 등을 참여했었다. 많은 것을 한 번에 얻으려고 한 결과일까. 나는 일부를 팀에서 적용해보고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용성이 80% 정도라도 많이 이용하는 것이 사용성이 100%지만 소수만 이용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이시죠?" 최근에 봤던 최종 면접(이라기보다 상호 인터뷰에 가까웠던)에서 대표님이 장황하게 얘기했던 내 말을 정리해서 되물었다. 나는 여전히 사용자 경험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 경험을 좋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비중이 조금 줄어든 감이 없지 않다. 1년도 안된 사이에 예비 기획자/PM이 서비스를 분석한 사례가 많아졌음을 체감한다. 그런 글을 보다 보면 편향된 제품 시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내가 쓴 UX 분석 덕에 채용 기회가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목을 잡는 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PM 초기에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심미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UI를 바꾼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용을 들여(디자이너와 개발자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바꾼 것에 비해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의 입장만 알 수밖에 없는 취준생 시절에는 겉으로 보이는 영역만 개선하기 쉽다. 하지만 실무자로서 보이는 영역을 넘어 더 넓은 시각에서 제품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이야 이때는 이렇게 시작하고 이런 것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때는 내가 PM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화면만 그리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한 번은 CPO와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1:1 미팅에서 '내가 프로덕트 매니저가 아니라 UI기획자인 것 같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사용자 인터뷰, 로그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던 초기에 비해 갈수록 시키는 대로, 익숙한 방식으로만 일하려는 내 모습을 보고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 신입 PM이 유일한 곳에선 PM 커리어를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준비 운동 없이 트랙을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쉬는 동안 나는 이력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이전에 해왔던 프로젝트를 살펴보고 어떤 점이 좋았고 아쉬웠는지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프로젝트를 하는 중에는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쓴 문서들에선 경영진과 팀원을 설득하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정리했던 흔적들을 발견했다. 아, 내가 헛살았던 건 아니구나. 형편없게 바라봤던 결과물들을 그제야 필터 없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점을 찾게 되었다.
2월에 PM Playbook이란 이름으로 노션 글을 SNS에 공유했다. 취준 하면서, 그리고 취업 후에 업무 관련한 자료를 찾으면서 모아두었던 아티클, 책, 강의를 리스트 형태로 정리한 글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 줘서 기분이 얼떨떨했다. 나에겐 별거 아닌 거라도 누군가에겐 정말 필요한 자료가 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때 이후로 좋은 아티클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SNS에 공유하는 습관이 생겼다.
1월에 원티드 북클럽장을 맡아 북클럽을 운영했었는데, 그 기억이 좋아 이번엔 직접 독서모임을 추진했다. 린 분석, 좋은 서비스 디자인, 그리고 내년에 진행할 임파워드 책까지. 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관점으로 얘기를 나눠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앞으로도 나누고 싶은 책이 있다면 독서모임을 추진해보려 한다.
원룸으로 이사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시원, 셰어 하우스만 전전하다 드디어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이다. 전에는 자주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짐만 남기려고 했는데, 인테리어에 욕심이 나 이것저것 꾸미기 시작했다. 창문 커튼, 러그, 발매트 등등. 나중에 이사 갈 때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은 분위기도 내고 좋으니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드디어 요리를 시작했다..! 친구에게 우스개 소리로 굽는 거만 먹는다고 말할 정도로 요리에 요자도 하지 않았는데, 유튜브에 올라오는 간단한 요리 위주로 조금씩 시험해보고 있다. 확실히 요리를 할 줄 알게 되니 늘 먹던 음식에서 좀 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최근에 다시 의욕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요리가 생겨서 좋다. 두부계란덮밥, 김치볶음밥, 양배추피자, 길거리 토스트 등등 알차게 해 먹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 약 두 달간 구직 활동을 했다. 아직 연차가 많지 않아 경력직 포지션은 서류를 넣는 족족 떨어졌지만, 간혹 페이스북이나 이메일을 통해서 포지션을 제안을 받아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구직 활동 전에 읽었던 브런치 글이 있었는데 면접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글에선 면접을 활용해 더 나은 답변을 준비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글에서 제안한 방식을 따라 해 얼마 없는 면접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면접관분들께 어떤 점 때문에 서류가 통과되었고, 면접 과정에서 아쉬웠던 답변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크리스마스 주에 선물처럼 전환형 인턴 합격 문자를 받았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이제껏 배웠던 것들을 차근히 적용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내년을 기대하고 있다.
드물지만 개인 메일이나 링크드인으로 PM 커리어로 전환하려는 분들의 연락을 받았다. 사실 내 경험이 일반적이진 않기도 하고 스스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어 감히 어떤 것이 정답이다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콜드 메일을 보낼 만큼 간절한 사람에게 거절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시간을 들여 답을 주었다. 이메일 내용엔 정답은 없다는 전제를 깔고 직접적인 답보다는 오히려 되물어 보는 질문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데이원컴퍼니 교육 기획자분과 PM 직무 관련한 커피챗을 진행했다. 대학생과 취준생을 대상으로 PM 직무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여러 현직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와 구직 중이기도 해서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노션으로 만들었던 자료가 인상 깊었다고 하며 관련해서 얘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 기획자분과 얘기하면서 나 스스로 어떤 PM이 되고 싶은지 정리할 수 있었다. 도움을 드린 거긴 하지만 반대로 나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올해의 책은?
골든 해빗, 일의 철학 두 책을 꼽고 싶다. 둘 다 구직 시기에 일에 대한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면접 자리에서도 이런 가치관이 잘 녹아서 답변할 수 있어 좋았다.
올해의 영화는?
디어 에반 핸슨. 뮤지컬 영화라는 얘기에 바로 예매하고 보러 갔는데, 이럴 수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전에 읽었던 책 얘기잖아?!' 하고 소름 돋았었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영화 중간중간에 노래가 너무 좋아서 따로 OST를 찾아서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노래를 따라 부를 정도로 좋아한다. 인생 영화..!
올해의 음악은?
디어 에반 핸슨 뮤지컬 노래인 The Anonymous Ones.
그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는 아래와 같다.
The parts we can't tell, we carry them well
But that doesn't mean they're not heavy
올해는 작년과 달리 PM 정체성, 일하는 자세에 대해 초점을 두고 정리해 보았다. 아무래도 고민에 대한 내용이 주로 담아서 글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이 든다. 고민이 있을 때만 글이 잘 써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내년에는 이런 고민도 한 때라 느껴질 정도로 성장해 있길 바란다. 2021년 회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