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일만 수행하는 사람
내 일의 주도권을 갖기 위한 발버둥
지난 수요일 프로필 기능에 대한 초기 기획을 리뷰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전부터 프로필 기능에 대한 요구가 계속 있었기에 배경과 목적 그리고 최소 요구사항을 설명했다. 여기에 보완할 점이 없는지 덧붙이며 말을 마쳤다. 스펙에 대한 얘기를 할 것이라 예상과 달리 CPO로부터 '목표가 너무 모호하다, 뭘 뾰족하게 하고 싶은지 모르니 최소 스펙이 뭔지 결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프로필 기능을 요청한 건 CPO님이고 그전까지 기획서도 미리 공유하고 피드백을 달라고 했었는데 그때는 아무 말 없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딱 잘라 말하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내 표정이 안 좋을 걸 알았는지 뭐가 이해하기 어렵냐고 물었다. 나는 회의 때 피드백받은 부분이 이해가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프로필의 최소 기능만 설명하기보다 나아가 어떤 엔드 픽처를 생각하고 있는지 설명했으면 이해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때는 어느 정도 수긍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상한 상태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게 시발점이었을까 퇴근 시간에 좀처럼 가지 못하다 회의에 참관했던 L님께 여쭤볼게 있다고 운을 떼었다. L님도 프로필 기능을 요청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프로필 기능을 출시했을 때 어떤 성과를 기대하고 있냐고 물었다.
한참 얘기가 오가다 감정이 올라오면서 말을 엉클어버렸다. '다른 PO도 비슷하게 얘기해도 오케이하고 넘어가는데 왜 나만 이런 피드백을 받나요' 설명하지 못했던 그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아도 넘어갔던 다른 PO분들과 달리 내 기획서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얘기였으니까.
L님은 내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사실 자기도 오늘 왜 이거밖에 못 생각하냐 고민을 안했냐라는 챌린지를 받았다고. 분명 자기는 오래 고민하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 않게 받아들여서 힘들었다고 했다.
'네가 운이 안 좋았던게 아닐까?'
다른 PO분들도 각자가 받는 챌린지가 있다고 한다. 어떤 분은 좀 더 전략적인 방향을 세우라는 챌린지를, 어떤 분은 좀 더 일정을 빠르게 해 주라는 챌린지를.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받는 챌린지가 억울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왜 수행하는 역할만 하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상급자가 요구하는 기능을 당연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왜 그 기능이 필요하고 우리 비즈니스 목표와 어떤 연결점이 있고 기대하는 임팩트는 뭔지를 되물어야지 않았을까. 그러니 CPO님의 머릿속 기대치와 다른 결과물을 내놓고 목표를 떼려 맞추는 식의 일을 하지 않았나 싶었다.
앞으로 이런 요청사항이 왔을 땐 바로 진행하기보다 명확하게 목적을 요구하자. 그리고 OKR과 연결점이 흐릿하다면 반대로 연결점을 얘기해달라고 말하자. 안 그러면 내가 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위에 시키는 일만 수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