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번째 밤
해림(海林)
이름 앞에 호를 지어준다면 해림이라 부르겠다. 옛날 선조들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귀하게 여겨 호를 지어 부르게 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예명과 같다. 필명으론 '꽃비내린'을 쓰지만 일반적으로 부를 만한 이름은 아니다. 호를 짓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중 좋아하는 자연을 붙여 짓는 방식을 따랐다. 해림은 바다와 숲이란 의미로 마음이 울적해질 때 가장 먼저 찾는 장소다.
부산에 나고 자랐지만 바다보다 육지에 가깝게 지냈다. 매년 여름에 피서지로 유명한 해운대도 시큰둥했다. 서울에 올라와 지내면서 부산, 특히 바다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서울에서 생활한 3년 동안 1년에 한 번씩은 부산 여행을 떠났다. 정작 수영은 싫어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밀려오다 멀어지는 파도 소리를 감상하는 걸 좋아했다. 그 뒤론 바다와 가까운 동네를 찾아다녔다. 동해안에선 겨울철 특유의 찬 바람과 거친 파도를 만났고 서해안에선 넓게 펀 갯벌 위를 걸었으며 남해안에선 잔잔한 물결에 윤슬을 눈에 담았다. 바다를 보고 나면 기나긴 갈증을 채워 다시금 살아게 했다.
서울은 공원이 많아서 좋다. 가장 좋아하는 숲은 성수동에 있는 서울숲이다. 주말마다 와서 숲을 걷고 근처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과를 마무리하곤 했다. 숲에 있으면 도시의 소음이 가라앉고 자연의 소리가 기지개를 켠다.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쨍한 햇볕 아래보다 오후 5시쯤 노을이 물들어가는 시간에 숲에 있는 걸 좋아한다. 회사가 서울숲 근처였을 땐 점심시간이면 편의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서 먹는 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바다와 숲은 세상의 안식처와 같다. 회사와 집을 반복하면 숨이 막히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바다와 숲을 찾는다. 머리를 무겁게 눌렀던 잡념들을 비워내고 활기를 얻는다. 누군가 내 아호를 부르게 된다면 깊고 푸른 바다와 광활한 숲을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