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이 왔다. 최대한 시원한 옷을 골라 입고, 선크림을 바르고 단단히 채비해 집을 나선다. 집 근처 공원은 며칠째 이어진 폭염 때문인지 한가하다. 공원에 상주하는 고양이들도 내리 꽂히는 태양을 피해 그늘에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런 여름의 한복판을 걷는다. 숨은 금세 차오르고 땀은 뚝뚝 흘러 세 걸음마다 눈가를 훔쳐내지 않으면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다. 마스크 안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땀과 뱉어낸 숨으로 흥건하고 목덜미는 햇빛이 마치 화살비라도 되는 양 꽂힌 자리마다 따끔거린다.
일부러 햇빛이 내리쬐는 벤치를 골라 앉는다. 입안은 쩍쩍 마르고 머리는 열로 어질어질하다. 앞으로 오분. 내가 이 땡볕에 버틸 수 있을 시간을 가늠하며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사방으로 압박하는 더위를 온몸으로 느끼면 마치 밥통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찜통더위라니 누군지 몰라도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야외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나 몇몇 예외 상황을 제외하면 요즘은 폭염이라고 해도 그 더위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도 수월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 뉴스에서는 역대 최고 폭염, 열돔현상, 열대야라고 연신 주의를 주지만 실내 생활을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때 잠시 잠깐만 피하면 되는 소낙비 같은 더위다.
출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어디든 실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반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더위를 피해 뛰어든 실내의 시원함에 몸과 숨을 놓는다. 창 밖의 시린 햇빛에 부르르 진저리를 치면서. 여름에는 당연 더위를 타는 사람의 온도에 맞춰야지. 최저 온도에 맞춰진 에어컨 바람을 맞다 보면 자연스레 카디건을 꺼내 걸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여름에 카디건이라니. 이런 사치가 있을까.
그래서일까. 일부러 뜨거운 한낮 시간을 골라 밖을 나왔다. 여름의 더위를 제대로 마주한 게 언제였지. 누군가는 배가 불렀다고 한탄하겠지만. 뜨뜻하게 달궈진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거슬러 되감아본다.
어린 나. 땡볕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집 앞에 앉아있다. 실수로 떨어뜨린 알사탕을 향해 줄줄이 행군하는 개미 떼를 바라보고 있다. 계속 바라봐도 똑같은 장면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괜히 개미 줄을 막아도 보고 뒤를 쫓아 기어이 개미구멍을 찾아내기도 한다. 어느 여름의 낮에는 동네 친구들이 다 같이 잠자리 채를 들고 모였다. 어깨에는 비스듬히 잠자리 통을 메고 누가 더 잠자리를 많이 잡는지 내기를 하기로 한다. 올려다보면 잠자리가 하늘을 덮을 듯 가득하다.
한참을 동네를 돌아다니다 아직 열기를 식히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온다. 대야에 찬물을 가득 담아 차갑게 식혀둔 수박으로 화채를 해달라고 엄마를 조른다. 반으로 쪼갠 수박이 우리 앞에 대령하면 밥숟가락으로 수박을 퍼낸다. 반은 뱃속으로 먼저 들어가고 반은 화채용이다. 얼음을 넣고 사이다와 우유를 수박과 섞어 화채가 완성되면 방금 전까지 먹은 수박은 어디로 갔는지 또다시 정신없이 화채를 들이켜기 시작한다. 배탈이라도 날까 적당히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꺄르륵 웃음으로 흘려버린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미지근한 장판에 눕는다. 선풍기를 틀고 집 안의 창문은 사방팔방 열어 둔 채다. 매미소리가 마치 폭염경보를 울리듯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 같아.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어. 안 그래도 더위 때문에 짜증 나는데 매미까지 이러기야? 화를 내도 보란 듯이 볼륨을 높인다.
다시 공원의 나. 주위를 둘러본다. 풀숲이 제법 많지만 잠자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도 없이 고요하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어. 마른 입을 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에 돌아오니 양 볼이 시뻘겋다. 괜한 짓을 했어. 혀를 차며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튼다. 밖은 한여름이라지만 방 안은 더위의 한 조각도 느낄 수 없다.
이상하다. 분명 더위는 징글징글하고 싫은데. 땀 흘려 끈적거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은 찝찝하고 싫은데. 여름의 한복판에서 여름을 그리워하는 내가 이상하다. 한여름에 한낮을 골라 집을 나서 여름의 더위와 마주하고 싶어지는 건 더위가 그리워서일까. 추억이 그리워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