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우린 춤을 추네
어릴 적부터 나는 우산을 참 잘 못 썼다. 그 쉬운 우산 쓰기도 버거운 사람이 세상에 나처럼 있긴 있지 않을까. 아무튼 누군가와 같이 비 오는 길을 걸어도 결국 더 젖는 건 나였다. 우산을 썼음에도, 비가 많이 오는 날에 나는 꽤나 더 젖고는 한다. 아예 그런 날은 양말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언젠가 고등학생 때 하루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필 우산도 없어서 비를 잔뜩 맞은 적이 있었다. 망쳐버린 성적에 비까지 오니 그저 지옥 같았던 기분이다. 이처럼 예고 없이 잔뜩 쏟아지는 비는 어쩔 수 없다. 비는 비를 맞을 사람의 감정과 기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럴 때 우산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우산이 없다면 아예 어딘가에 들어가 있지 않는 이상 젖을 수밖에 없다. 그냥, 비가 오기에 젖는 것일 뿐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를 흠뻑 온몸에 맞는 것은,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과 재수가 조금 나쁘다고 밖에는 탓할 게 없다. 그래도 세상이 아직 완전히 정을 잃진 않아서, 비는 언젠가 그치고 젖은 옷을 말릴 정도의 따뜻한 햇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비가 쏟아질 듯 내려도, 그 비도 언젠가 그칠 날이 올 거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건 그거고, 당장 처량하게 젖어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문제다. 해가 뜰 거라는 소리는 너무도 요원해 보이기도 한다.
5월 5일과 6일 양일간 열렸던 밴드 넬의 공연 제목은 'Dace in the Rain'이었다. 'Dance in the Rain'이라는 구절은 C앨범의 두 번째 트랙 'Day after day'라는 곡 속 가사의 일부분이다. 다소 짧게 편곡된 '인정의 미학'을 인트로 삼았고, 이어 본격적인 첫 번 째 셋 리스트 'Eden'이 들렸다. 개인적으로 'Eden'라이브는 처음 들어봤는데, 아주 거친 감성으로 이 노래를 불렀던 음원과 비교하면 그 당시보타는 덜 고통스럽게 부른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후반부에 몰아치는 순간에는 여전한 야성미가 보이기도 했지만. '지구가 태양을 네 번'을 기점으로 관객들을 일어나서 공연을 즐기기 시작했다. 드러머 정재원이 일신상의 이유로 팀 활동을 잠시 중단하면서 호응 유도 면에서는 다소 빈자리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 몰입하지 않은 곡은 없었다. 특히 '시작의 끝'과 '오후와의 대화'를 하루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넬의 연말 혹은 크리스마스 공연이 정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거대한 '쇼'를 하는 느낌이라면, <Nell's Season>이라는 콘서트 브랜드는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던 곡들의 라이브를 듣는 재미가 크다. 그들이 콘서트를 한다면 버선발로 달려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셋 리스트의 어떤 곡이 또 어떤 무대 효과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지 그저 궁금하기 때문이다.
'Fantasy'를 비롯하여 신나는 음악들이 나왔고, 잠시 '비 타임'이 시작되었다. '비'라는 단어가 들어있거나 '비'와 관련된 감정이 드는 노래들을 연달아 부르는 무대가 이어졌다. 'Blue', '정야', '일기오보' 그리고 'Day after day'와 'Love it when it Rains' 이렇게 다섯 곡이었다. 요즘 마침 자주 듣고 있었던 '정야'가 나올 줄은 몰랐다. 절절하고 안타까운 가사와 가창에 울컥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네가 예전에 내게 그랬듯이'라는 무력한 가사가 나올 때는 조금 무너질 뻔도 했다. 그 구절을 들으며 내가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을 때에도, 그럼에도 어떻게든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 주었던 누군가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정야'를 부르기 전, 보컬 김종완은 '혹시 헤어지더라도 그때 넬 콘서트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길...'과 비슷한 멘트를 했다. 웃자고 한 얘기였겠지만, 새삼스레 떠올릴 사람이 있어 다소 눈물이 나는 걸 조금 참기도 했다. 이 역시 예고 없이 내려버리는 비와 같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들리우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금 무너지는 일이 비에 젖어버리는 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의외로 'Sober'가 연주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비와 관련된 노래들 다섯 곡을 연달아 불러줬던 순간이 내겐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
형식적인 마지막 곡은 'Standing in the Rain'이었다. 넬은 2012년 'Standing in the Rain'을 타이틀로 공연을 한 적 있었다. 당시엔 고3이라 그 공연에 갈 수 없었다. 언젠가 그와 비슷하게 비를 테마로 한 공연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랐었고, 이번 <Dance in the Rain>은 그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Standing in the Rain'은 사운드나 가사 면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다. 아주 초반의 '잡고 싶은 기억들만 가슴속에 새겨두자'라는 가사의 의미를 많이 되뇌고 있기도 했다. 라이브에서는 특히 최근에 후주까지 추가되었는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공연장에 무형의 비가 내리나 싶을 정도로 멋진 무대였다. 이후 공연은 앵콜로 '기억을 걷는 시간'과 'Stay', 그리고 불멸의 화합송 'Ocean of Light'로 이어진 뒤 모두 마무리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있던 자리를 볼 때 가수들이 약간의 공허함을 느낀다는 걸 어디서 본 적 있다. 그러나 열렬히 바랐던 공연이 끝나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관객들의 마음도 아티스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테다. 'Ocean of Light'에서 모두가 환호하고 떼창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넬도, 우리도, 밴드의 날들도 우리 모두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Standing in the Rain'은 2012년에, 'Day after day'는 2016년에 발매된 곡이다. 4년의 터울이 있는 이 노래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Standing in the Rain'은 무기력하다. '비가 오면, 맞는 수밖에 없다'라는 체념적인 느낌의 가사를 지녔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라는 가사가 대표적이다. 반면 'Day after day'에는 비가 쏟아져도 자신은 항해를 할 것이며, '그러면 어때'라고 반문한 뒤, 자신은 아예 빗 속에서 춤을 출 것이라 말한다. 이전에는 무기력하게 비가 오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라고 말했던 이들이, 이제는 빗속에서 춤을 출 거라고 4년 만의 앨범에서 얘기한 것이다. 그동안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체념과 단념만이 가득했던 상태에서 더 능동적으로 삶의 어려움들을 맞이하겠다는 소리로 느껴찌고, 그리고 그 가사를 쓰기까지 넬이라는 밴드가 걸어오고 달려온 시간이 그저 뭉클하게 다가온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넬이 그토록 까지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은 적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게는 일면식도 없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멘토들이기 때문이라고.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좋은 선배나 멘토가 되는 건 아니다. 넬은 뒤처진 나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끌어주진 않는다. 다만, 때론 아픈 길을 걷고 또 때론 상처도 나겠지만, 그 아픔과 상처가 아물기는 한다는 따뜻한 발자국을 남긴 인생 선배다. '비'는 다만 예시일 뿐이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곳에 닿기까지의 넬의 여정을 생각해 보면서, 나의 지금도 언젠가의 나도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 세상을 지탱하는 게 희망과 추억이면, 나는 한 축을 운 좋게 얻은 셈이다.
곡 'Day after day'에는 '그러면 어때'라는 구절이 나온다. '물론 다 흠뻑 젖을 테지만 '그러면 어때''라고 노래하는 구절이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는 언제나 막막하다. 우산도 피할 곳도 없이 그 비를 온전히 다 맞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를 대하는 태도다. '비 좀 맞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아예 빗 속에서 춤을 출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즐거운 삶의 자세가 아닐까. 언젠가 방문했던 아프리카 빅토리아 폭포에서, 나도 비가 왕창 쏟아지는 구간에서 자유로이 뛰어다니고 춤을 췄다. 잠시 다른 얘기지만, 영화 <라라랜드> 엠마 스톤의 이모는 파리 템스강에 뛰어내려 한 달을 감기로 고생했다고 한다. 넬이 말하는 '빗 속에서 춤을 출 거야'라는 표현도 이와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인다. 남들 눈엔 이상해 보일지라도, 또 흠뻑 비를 맞더라도, 상관없이 이 비에 춤을 춘다는 것이니까. 무력함과 무기력이 얼마나 이겨내기 힘든 것인지 알기에, 그토록이나 무기력했던 사람이 이젠 스스로 빗 속에서 춤을 춘다고 말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지 차마 짐작하거나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고맙게도 지금도 넬은 음악을 하고 있고, 나의 마음도 그들의 그것처럼 조금은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멤버 변화 없이 밴드를 지속한다는 건 분명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넬이 앞으로도 음악을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다. 또 음악하는 자신들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최근 힘든 일들이 많았고 드러머 정재원이 잠시 활동을 멈추었지만, 다시 네 사람이 음악을 함께 그것도 아주 먼 훗날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얼굴 한 번 똑바로 혹은 제대로 본 적 없는 그룹이지만, 나는 내 첫 책 말미에 일면식도 없는 밴드지만 감사하다는 말을 적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은 내게 중요한 멘토들이다. 넬의 콘서트에 다녀오면 여운과 행복함이 나를 둘러 존재한다. 여운 속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얼마 없던 멘트들 중 이번에 가장 가슴 안에 남았던 건, 'MD 티셔츠'에 적힌 'NELL'이라는 글자가 부끄럽지 않은 밴드가 되겠다는 약속이었다. 조금 민망하지만 나도 회사에까지 넬의 공연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도 한다. 넬은 그 정도로 나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삶은 꽤나 부조리해서, 넬에게나 나에게나 당연히 새로운 시련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 그 시련에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빗 속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당당히 그리고 덜 불행하게 아픔을 대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너무 고마운 이 밴드 덕분에 지난 기억을 걸었고, 앞으로도 믿어선 안될 삶이 괴롭힌다고 해도 버틸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변하지 않는 건 변함뿐이라지만, 이들이 아주 오랜 시간 넬로서 우리의 곁에 머물러(Stay) 주는 것에는 변함이 가능한 늦게 찾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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