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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emian Writer May 27. 2023

한없이 서글프기만 한 말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의 슬픔에 대해

    한 술자리였다. 다음 날의 숙취만큼이나 부질없고 실없는 얘기들이 오고 갔다. 그러다가 들린 말, "사는 게 다 그렇지". 누군가 무심히 던진 흔하디 흔한 말에 나는 취하지도 않았는데 조금 휘청였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다들 아프고 괴롭고 그걸 버티다가, 어쩌다 잠시 행복 비슷한 순간이 오면 그에 반갑게 감응하며 사는 거겠지. 그러다가 문득,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곪게 만드는지에 대해 알고는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런 아픔도 없는 삶은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없다. 물론 모든 이에게 질문을 한 건 아니기에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하는 삶의 존재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울 거라는 추론은 조금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슬픔과 힘듦을 토로했을 때, '사는 게 다 그렇다'라는 답을 들어도 그건 오답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는 없다. 말 자체는 맞으니까. 통증은 삶을 견뎌냄에 있어서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니까.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상처들을 '사는 게 다 그렇다'라는 말로 퉁치는 게 내게는 거대한 부조리였다. 사는 게 다 그렇더라도, 아픈 건 아픈 거고 이건 다른 얘기니까.


    내가 몹시나 유난스러운 건가,라는 자기 반성을 잠시 하기도 했다. 남들 다 그렇게 사는 것인데 나만 뭐가 문제여서 홀로 이렇게 괴로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내 의식을 잠식한 적도 있었다. 그 무엇도 어렵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어쩌면 종교인이라면 가능하려나. 그들은 이런 영역에 있어서는 일종의 '전문가'니까. 하지만 그런 프로들 중에서도, 무엇에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주 드무리라 추측한다. 그런 사람들도 그런데, 그저 미약하고 나약한 나는 오죽하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을 두 글자로 줄이면 '원래'다. '원래' 삶은 아프고, 괴롭고, 때론 불행하고 또 어쩔 땐 즐겁거나 행복한 감정들의 복합체라는 문장에는 분명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나는 '원래'라는 말을 경계하는 편이다. '원래' 그런 게 어디있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몹시 맞는 명제가 동시에 오답이기도 한 이유다. 이는 그저 슬픈 체념이다. 남들도 다 똑같이 아프고 괴로울 때가 있으니, 나 역시도 버티고 견디며 이겨내라는 의미 아닌가. 기대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억울함을 참아내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 두 번의 아픔 정도는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에 기댈 수 있을 것 같지만, 더 이상 이 한없이 서글픈 말에 빚을 지기에는 삶이 꽤나 안쓰럽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가 내게 아픔이나 힘듦을 얘기했을 때, 그 순간의 나만큼은 공감을 위해 애쓴다. 어차피 나는 그 사람이 한 문제에 대해 느끼는 아득한 슬픔을 알 수 없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나 역시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 무력한 존재다. 하지만 분명 상대방도 내게 어떤 솔루션을 요구한 건 아닐 것이고, 그렇기에 '네가 어떤 슬픔을 겪든 곁에 한 사람은 반드시 있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 명세서를 읽듯이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주워가며 슬픔의 서사를 완성하여 멋대로 그 크기를 재단하려는 시도는 어떻게든 지양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도 가급적 조심하려고 한다. 원래 삶은 이렇게나 지랄맞으니, 어쩔 도리 없이 나을 때까지는 아파할 수밖에 없는 말이지 않는가. 물론, 때론 그저 시간이 흘러 마음의 상처도 같이 씻겨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일 때가 있다. 그런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좋은 위로는 그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앞당겨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며, 그렇기에 위로는 숱하고 거듭된 연습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어쩌면 위로는,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체념에, 어렵더라도 '그래도 한 사람은 곁에 있다'를 조심스레 얹으려는 시도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어린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건넬 때의 말과 행동은, 역시 누군가에게 나의 상황과 감정을 토로하고 난 후에 받고 싶은 반응일 수도 있다.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다소 무성의한 말 대신, 구체적인 감정들에 집중해주고 나의 편에서 그 감정을 독해해보려는 마음 자체가 필요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사는 게 다 그렇지'는 분명 맞는 말이지만, 너무 맞는 말이기에 마치 가시돋힌 이불로 몸을 덮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불이기에 따뜻하기는 따뜻할 것이나, 되려 상처를 더 곪게 만들 수 있다.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을 들으면 결국 나 자신을 힐난하게 됨이 그 이유다. 내가 약하고 심지가 굳지 못해서 남들도 다 겪는 것에 홀로 휘청거리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분명 당장 어떻게든 조치가 필요한 상처를 보고도, 사는 게 다 이런 것이니 언젠가는 아물겠지라며 애써 상처를 외면하게 만든다. 몸의 상처처럼 마음의 그것도 제 때 즉각적이고 정확한 치료가 필요하다. 분명 무척이나 아픈 감기인데, 그냥 재채기 정도로 병을 축소하는 것과 같다. 몸이든 마음이든 상처 치료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파상풍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예고없이 찾아온 상처들을 그저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로 축소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사는 게 다 그런 건 맞다. 누구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간다. 큰 틀에서는 틀림 하나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하나의 삶은 반드시 언제나 하나의 개별적인 생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똑같은 아픔이라도 조금 더 힘겹게 받아들이는 나같은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는 게 다 그렇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다만 저 성의없는 명제로 그냥 뭉게버리기에는, 겪고 있는 순간들이 너무 지치고 괴로운 상황이라는 걸 알아는 달라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라며 상대를 유난스러운 누군가로 만드는 대신, 같은 편에 나란히 서서 같은 아픔을 응시하는 게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위로다. 시선들이 향하는 곳에 못나고 추한 상처가 있겠지만, 그리고 그게 금방 나아질거라는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세상을 공유한다는 것 만으로도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정말 고마운 힘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지지대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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