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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y 25. 2022

그날의 고백

회상


랄라를 키우면서 몇 가지 가슴에 새겨둔 문구가 있다. 하나는 일본에 살 때 들었던 격언이고, 하나는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느 날 문득 떠올라서 자신에게 한 다짐이다. 첫 번째는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두 번째는 "부모는 죽어서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을 때까지 함부로 남의 집 아이들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세 번째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자."


고지식한 나의 성격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중 하나의 예가 어떤 가치나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면 좀처럼 노선을 이탈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는데 온 힘과 정성을 쏟는다. 그것이 대단한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한 번 스며들어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 것이라면 좀처럼 변심하거나 배신하지 않는다.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라는 표현은 중고등학생 무렵 일본에서 들었는데, 가슴에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프게 비수처럼 꽂히는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그 뜻이 심오한 것 같아서 가슴 깊이 잘 간직해 두었다가, 나에게 이 말이 필요한 시기가 오면 잊지 말고 다시 꺼내어 봐야겠다는 느낌으로 가슴에 꽂혔다. 그로부터 십여 년 뒤에 나는 랄라의 엄마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 격언은 내 삶에서 다시 되살아 났다.


"부모는 죽어서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을 때까지 함부로 남의 집 아이들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은 할머니로부터 들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몸과 언행을 더욱 잘 챙겨야 한다. 특히 너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니, 남의 집 아이들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흉을 보면 언젠가는 네 자식에게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해라." 할머니 말씀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곧이 믿을 난데, 이렇게 이치에 맞는 말씀만 하시니 어떻게 평생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자'는 다짐은 랄라가 갓난아기였을 무렵 홀연히 스쳐간 생각이다. 내가 뭘 대단하게 아이에게 해주는 것보다는 적어도 아이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소박한 다짐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직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은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핼러윈, 랄라가 조던이라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버려진 검은 고양이를 만났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이미 야옹이 엘리가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또 다른 길고양이를 데리고 올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조던네 집은 엄마, 아빠, 아이들 네 명, 개, 고양이 네 마리의 대가족이 살고 있어서, 버려진 검은 고양이까지 거두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랄라는 스톰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간절하게 애원해서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루피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그 후 랄라는 루피를 거의 '봉양'하다시피 했다. 루피는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 유난히 작은 체구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밖에 살아서 그런지 검은 털이 거칠고 윤기조차 흐르지 않았다. 수려한 외모의 엘리에 비해 루피의 행색은 남루하고 초라하고 뭔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랄라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루피를 아꼈다. 여덟 살 랄라는 조그마한 루피를 품에 안고 다니고 싶어 했지만, 루피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랄라의 팔이며 다리며 손등에는 루피가 할퀸 상처가 점점 늘어갔고, 엄마인 나는 랄라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루피가 야속했다. 그렇게 루피가 나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있을 무렵,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뒷 뜰에는 아직 떨어진 낙엽이 수북했고, 하늘은 침울하고 바람은 싸늘한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랄라가 뜬금없이 루피가 답답해할 거 같다며 가슴에 안고 뒷 뜰로 향하는 문을 쏙 빠져나갔다. 직감적으로 둘의 뒤를 바로 따라나섰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바깥공기를 마신 루피가 쏜살같이 랄라 품에서 뛰어내려 저 멀리 담벼락을 향해 전속 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얄팍하게도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 빗속에 내가 루피를 따라 뛰어간다고 잡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지. 내가 어떻게 저 담을 넘어서 남의 집을 들어갈 수 있겠어? 거길 간다고 루피가 있으라는 법도 없고, 어쩌면 루피는 밖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어. 아니야. 루피가 나중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올지도 몰라. 일단 기다려보자.'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엄마인지 자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왜냐면 우리 랄라는 이미 맨발로 뒤뜰을 가로질러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위태위태하게 자기 키 보다 높은 담장을 넘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냉기가 엄습하는 동시에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랄라를 뒤따라서 나도 뛰어야 하는데 두 발이 땅에 달라붙어 꼼짝달싹을 하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진 자세로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시간이 멈추고 비도 멎고 심지어 눈앞에 모든 세상이 잿빛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감사하게도 랄라는 온몸이 비와 땀으로 뒤범벅된 채 양팔로 루피를 감싸 안고 우리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나는 랄라보다 비겁하고, 매정하며,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랄라가 이런 나를 닮지 않고 용감하고, 따뜻하고, 직관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내 딸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랄라의 이런 면을 귀하게 여겼다.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러, 랄라는 대학 원서에 그날의 이야기를 소개했고, 지망한 대학에 입학했다.


"Even at eight years old, I was able to follow my instinct while pushing aside any concerns of judgment. At the time, my friend had found a stray black cat that had followed her home on Halloween. She already had many pets, so I volunteered to take the cat. However, I was betrayed by my soon-to-be-named cat, Loopy, because the moment I let her into my backyard, she jumped over my fence. Without any other thoughts, in my orange striped cotton dress and with bare feet, I ran after my cat. I hopped many fences around my entire neighborhood, following Loopy wherever she went: under cars, through the forest, and through the rain, hoping I would eventually catch her. When we made it back to my street, Loopy had finally acknowledged my hard work and surrendered. I snatched my cat and ran back down White Rose Trace, passing all my neighbors who had seen the c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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