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air
2025년 9월 19일 금요일
9월 10일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생명의 소중함과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2003년에 제정한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무겁게 다가온다.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은 직·간접적으로 생명의 끝자락을 어렴풋이 바라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치료사의 길을 걸으며 자살을 탐구하고, 예방을 배우고, 내담자를 돕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본능적인 두려움이면서 동시에, 삶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실제로 내담자의 마음속 자살 충동을 알아차리고, 자살생각척도를 통해 그 강도를 가늠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심스레 살피는 일은 늘 긴장을 동반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살 위험을 알리는 신호들은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숨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담자의 언어와 행동,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 속에 은밀히 드러나곤 한다.
특히 극심한 스트레스, 만성 질환과 통증, 깊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의 눈빛에서 나는 종종 그런 신호들을 발견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혼자 두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 것,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자살에 대해 직접 묻는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전문가에게 연결해 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신속히 긴급신고를 통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이 작은 실천들이 모여 한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안전망이 된다.
임상 경험을 돌아보면, 절망의 깊이와 자살생각의 강도는 비례했다. 흥미로운 것은 '절망(Despair)'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희망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절망은 결국 희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절망을 응시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영국·아일랜드 출신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yte)의 ‘절망’에 관한 글을 함께 나누며,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홀로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를 건네고 싶다.
절망은 갈 곳이 없을 때 우리를 데려간다. 마음이 더는 부서질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의 세계나 사랑하는 이들이 사라질 때, 우리가 사랑받을 수 없다고, 혹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을 때, 신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 혹은 몸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깊은 고통을 짊어지고 있을 때, 절망은 우리를 끌어안는다.
절망은 잠시 머물 수 있는 피난처이자, 자기 연민 속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상처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자 할 때 받아들이는 초대이자 마지막 보호막이다. 절망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잠정적이지만 꼭 필요한 환영을 찾는 일이며,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다치지 않으리라는 바람을 품는 일이다.
절망은 필연적이며 계절 같은 수리(Repair)의 상태다. 이전에 세상과 관계 맺던 방식이 쉬어가는 시간, 심리적·생리적 내면의 겨울이다. 지평을 잃은 듯한 상태,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발견되고 싶지 않을 때 우리가 도달하는 자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희망을 포기한다. 그러나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형태를 아직 찾지 못했더라도, 우리가 견디고 치유하는 시간이다.
절망은 기묘하게도 희망의 마지막 보루다. 예전의 방식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면, 같은 방식으로 다시 상처받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이 그 안에 있다. 절망은 몸을 떠난 듯하지만 여전히 몸 안에 머물며,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달콤하고 허망한 추상이다. 세상에 더 이상 집을 짓고 싶지 않을 때, 애초에 그 집을 가질 자격조차 없었다는 잔인하면서도 묘한 만족 속에서 절망은 자리 잡는다. 절망은 이상하게도 스스로 성취감을 품고 있으며, 더 이상한 것은 절망이 살아남기 위해서 절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절망이 자신의 계절을 넘어 계속 머무르려 하고, 얼어붙은 실망 위에 정체성을 세우기 시작하면 그것은 우울과 추상으로 변한다. 절망이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몸의 감각에서 자신을 떼어내고, 실망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계절이 멈추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무엇보다도 몸의 깊고 온전한 호흡을 거부할 때이다. 절망은 시간의 흐름과 리듬을 얼어붙게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시간에 갇혀 있다고 느끼지 않고, 계절이 지나도록 내버려 두면 결국 절망은 힘을 잃는다.
절망을 붙들어 두려면 우리는 몸과 청각, 촉각, 후각의 문을 닫고, 주위 세상의 봄기운을 차단해야 한다. 절망은 고립과 단절을 요구한다. 그러나 몸은 스스로 호흡하고, 귀는 아침의 첫 새소리를 듣고,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소리를 포착한다. 바람은 가장 무거운 잿빛 구름조차 흩어버리고, 멈춘 듯한 계절조차 움직이게 한다. 심장은 계속 뛰고, 우리는 결국 세상이 결코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절망의 해독제는 억지로 행복을 흉내 내려는 용감한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억눌린 생각과 이야기를 넘어, 몸과 호흡에 깊고 용기 있는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심지어 절망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있던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절망이 애초에 우리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절망을 온전히 몸으로 경험해 본다는 것은, 절망을 필연적인 계절의 방문으로 보는 첫 시도이며, 억지로 붙잡지도, 성급히 밀어내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바람 속에서, 오롯이 절망의 무게를 감당하며 땅을 딛고 일어서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발을 내디딘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세상이 다시 숨 쉴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 순간 절망은 다른 무엇으로, 다른 계절로 변할 수밖에 없다. 본래부터 그렇게 변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은 힘겹지만 아름답고 필수적이다. 그것은 상실을 통해 연결된 인간적 경험 속에서, 힘들고 치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의 결속된 이해다. 절망은 감옥이 아닌, 몸을 통과하는 파도이자 지나가는 계절이다. 여여한 계절은 언제나 스스로의 인내와 힘과 의지로, 비록 아주 천천히일지라도, 나아간다.
절망 자체를 절망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절망이 그 본연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 그리하여 타인의 진심 어린 슬픔을 보고, 이해하고, 어루만지고, 심지어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인간에 대한 자비심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