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몸이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혼자라는 감각. 영혼은 머릿속에 갇혀 어지러운 언어들을 펼쳐놓는다. 영혼의 범람이 일어날 때면 머리 한구석에 웅크리고 숨는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어 곧 휩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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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주로 서식하는 장소는 기억의 방이다. 일렬로 쭉 늘어선 하얀 복도와 번호가 붙은 문. 문을 열면 텅 빈 방과 그 한 면을 채우는 거대한 스크린이 존재한다. 하나는 나의 방, 나머지는 내가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들의 방이다. 무장하지 않은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복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모든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동으로 상영되는 영상. 종류는 끝이 없음에도 직접 선택할 권리는 없다. 오늘의 상영관은 17번. 17번 상영관으로 이동해주세요.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발은 공항에서 무빙워크 위를 걷다가 내려올 때처럼 바닥 위를 미끄러진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오늘 상영할 영상은 실수 모음집입니다. 대피를 위한 비상구는 없습니다.다시 안내합니다. 오늘 상영할 영상은 실수 모음집입니다. 대피를 위한 비상구는 없습니다. 나는 중얼거린다.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
영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단순명료한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사애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를 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얼굴에 걸고 있던 상황에 맞지 않은 묘한 미소, 물음표인지 마침표인지 모를 불분명한 어조, 원래라면 평범하게 지나갔을 일이지만 그날따라 이상했던 타이밍, 오랫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 소진된 사회성. 실수들의 행진을 가만히 바라본다. 목소리가 말한다. 네가 실수한 거야. 알지? 사람들은 너를 미워할 거야. 너는 사랑받을 수 없어. 가끔은 사람들에게 과거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더 손쉽게 내 존재를 사람들 속에서 지울 수 있을 텐데. 누군가의 얼굴을 볼때마다 내가 저지른 실수들이 떠오른다.
목소리들은 자기들끼리도 통합이 되지 않는지 쉬지 않고 다툰다. 누군가 말을 꺼내면 다른 누군가는 반박하고, 그 반박에 다시 반박하는 식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만약 단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삶이 조금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있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알 수 없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침대에 누워 심해를 여행하는 시간. 가라앉아있던 기억과 언어들이 마치 물속에서 흩어지는 바다 밑바닥의 모래처럼 떠오른다. 어지러운 나는 어지러운 소리들 사이에서 뒤척이며 소음의 세계로 빠져든다. 안녕, 안녕. 반가워, 안녕. 고요함은 소란이 더 잘 전달되기 위한 매개체이며, 다정함과 사랑은 상처 받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강함이다. 나의 사랑은 상처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상처는 흘러넘쳐 글로 차오르므로, 나의 모든 글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밤이 좋은 것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와 목소리와 외로움만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연결도 찰나의 시선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끝없는 고독이 나를 낮의 세계로부터 아주 멀리 떼어놓기 때문이다. 밤의 손길이 나의 입술을 만지면, 나는 홀린 듯 마법 같은 언어들을 내뱉는다. 구멍 뚫린 자루의 곡식처럼 쏟아져 나오는 언어들. 솔직해지는 시간.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과 불안의 세계.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선명해 주위의 모든 것이 흐려진다. 미안해. 나는 현실에 닿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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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유지되는 적절한 균형. 한 사람 더 발을 디뎌도 저울이 버텨줄까. 기울지 않을 무게중심은 어디인가. 조심하지 않으면 추락으로 직진. 완전한 패배. 돌이킬 수 없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의 질서를 지켜야지.' 목소리가 속삭인다. 알아요. 하지만 불공평하잖아. 이쪽이 더 무거운걸. 저울은 누가 만들죠? 침묵.
우리는 이미 졌어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조심은 선택권이 있을 때 하는 거랍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로 태어날 거라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 밑에서 넘실거리는 우울은 싸한 락스 냄새가 났다.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푸른 물과 표면의 빛. 바닥 타일의 무늬. 굴절과 왜곡.
-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참기 어려운 추락 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현기증 속에서 살았다. 이카로스. 태양을 나는 새, 그리고 추락. 이카로스가 죽은 것은 질서를 거슬렀기 때문인가요? 더 높이 날아가려 했기 때문에? '그래, 태양에 닿으려 했기 때문에.' 목소리가 말했다. 태양은 조리인가요? '그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누구도 태양을 떠나 살 수 없지.'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부조리가 되겠어요. 맞춰 볼까요?
- 이카로스는 태양을 살해하려 했던 거야.
수영장의 네모난 선을 따라 걷던 발이 휘청였다. 잔잔한 물 위로 거센 파문이 일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코가 맵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추락하고 싶어요. 더 높이, 그리고 더 아래로.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침묵. 목소리가 묻는다.
- 왜 그런 거야?
- 지금? 아니면 그때?
- 그때.
-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 웃음이 터졌다.*
이방인? 목소리가 묻는다. 이방인. 그녀가 대답한다. 두 팔로 지탱한 채 바닥을 힘껏 밀어 올라와 앉는다. 한쪽 다리는 여전히 물아래에서 흔들렸다. 굴절에 따라 흐물거리는 신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 그건, 태양 때문이었어요.
*미셸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 중 니체 인용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알베르 카뮈,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