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고사, 임용재수, 임용절벽
임용고사를 두 번 봤다. 한번 떨어졌다는거다. 우리교대 기준 1년 졸업생이 520명 남짓. 교대의 특성상 교대를 나오면 초등교사말고는 할게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을 새로 배우는것 말고는 먹고살 길이 없다. 4년 내내 공부하고 얻는 자격증이 초등교사2급 자격증이니까. 떨어진 학생은 고스란히 재수를 해야한다. 선택권이 없던 나는 재수를 했다.
내 앞의 내가 1학년일때 4학년이 시험보던 해 우리지역(충남)은 미달이었다. 다음해에는 미달인원이 적긴 했지만 아무튼 전원 합격. 그리고 우리 바로 윗 선배들은 미달없이 딱 인원수에 맞게 합격. 늘 800명씩 뽑던 우리지역은 내가 시험보던 해 180명을 뽑았다. 인근광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생의 30%가 탈락을 잠정적으로 확정지은거다. 그 탈락자 30프로 속에 내가 들었다. 앞서 말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1년을 더 공부해야만 했다.
학비상환을 위해 기간제교사를 하며 임용공부도 병행했다. 초등임용재수는, 그러니까.. 레이스에서 내가 탈락해서 다시 시작하는데 필연적으로 다른애들이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태. 그 압박감속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1남 3녀중 장녀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두번째 시험을 앞둔나는 고민했다. 친정집이 있는 경기도는 약 1200명, 내가 학교를 나온 충남 250명 선발예정. 당연히 집에서 다니고 싶었지만 작년에 1차 광탈을 맛본 나는 조금 위축되어있었다. 결국 원서접수 마지막날, 충남을 선택했다. 지역가산점 4점의 차이가 큰 변수가 될거라 생각했다.
시험이 끝나고, 나는 합격했다. 임용고사를 생각보다 너무 잘 봤다. 교육학은 만점이었고, 등수는 27등이라고 했다. 듣는 순간 조금 기분이 상했다. 경기도를 가도 붙었겠다 생각했다. 여기는 말그대로 타지인데. 외로워졌다. 엄마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이나 구하자고 했다. 군인출신의 할아버지가 지은 건물에 방이 하나 남았다길래 500에 30짜리 원룸을 계약했다. 가구를 집어넣고 엄마아빠가 집으로 가신 날 밤에 펑펑 울었다. 외로웠다. 외로운 그 마음때문에 사실 충남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럴려고 그렇게 됐나보다, 지금 살기 괜찮다, 라고 생각하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얘기고, 충남을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살고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경기도에서 내 시험지를 채점했다면 내가 그 점수를 받았을수 있었을까? 장담할수 없다. 인생은 그냥 그러려고 그렇게 된거고 그러려고 그렇게 사는가보다. 아무튼 충남교육청 사랑합니다.
아, 참고로 같이 임용재수를 하고 같은지역을 시험봤던 대학 동기는 그날 무척 행복해했다. 250명중에 243등을 했기 때문이다. 시험은 그렇게 봐야 되는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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