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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ul 21. 2020

우리 또 만나 #001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찾아오셨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입혔다. 말로 상처를 입은 것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 하루를 사는것과 같은거라던 어느 인지심리학자의 책 한구절이 생각이 났다. 둘다 각자의 일터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진통제도 없는 통증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쌓여있는 집안일이 켜켜이건만, 아무것도 할 힘이 없었다. 하루종일 열심히 뛰어놀았는지 짠내와 땀내를 구석구석에서 풍기는 딸아이만 간신히 씻겼다. 내 입으로 들어갈 밥을 겨우 퍼먹은 뒤 미안하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뭘 줘야 할지 몰라 피를 흘리고 있는 그에게 게보린을 하나 건넨 셈이다. 그러고는 이불을 펴고 누웠다. 옆으로 돌아누웠는데 눈물이 쿨쩍 났다. 어깨가 들썩거리려는 것을 간신히 이불을 덮어 가렸다. 안경도 빼지 않고 머리도 풀지 않고 누웠다는 것도 몰랐다. 눈물이 안경다리를 타고 귓구멍으로 들어가고서야 알았다. 그제야 안경을 빼고 머리를 풀고 누웠다.


"할머니."

틀림없는 외할머니였다. 할머니가 평소에 무슨 옷을 입었었는지 기억이 안날정도로 할머니는 정말 평상복을 입고 오셨다. 할머니는 여기저기를 들여다보셨다. 냉장고도 열어보시고, 김치냉장고도 열어보았다.


할머니는 부엌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냄비를 두개 꺼냈다. 분홍색 냄비에는 소고기를 가득 넣어 끓인 미역국을 쏟아부었다. 할머니는 무쇠가마솥에 미역을 가득 넣고, 소고기를 꼭 열 근을 넣어서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다. 거기에 다진마늘과 국간장만 넣으면 완성이라고 엄마가 그랬었다. 제사가 많은 외할머니댁에는 늘 손님이 많았다. 그 손님들은 꼭 그 미역국을 먹고가곤 했다. 그 미역국이었다.


검정색 작은 냄비에는 새우와 두부와 오징어가 들어간 칼칼한 찌개가 끓었다. 무와 동태와 된장으로 먼저 육수를 팔팔 낸 다음 새우와 두부와 오징어, 그리고 다진마늘, 국간장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 살던 밭에서 바로 뽑은 대파를 숭숭 썰어서 넣으면 명절마다 먹던 그 찌개였다. 어떤 날에는 꽃게가 추가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해삼이 추가된 적도 있었다. 이 찌개에는 절대 두부가 빠지면 안된다. 다 부서져도 두부가 큼직한게 들어가줘야 그 맛이 났다. 그 두부만 건져서 먹어도 맛있고, 다른 해산물과 함께 먹어도 맛있다. 거기에 들어간 무는 으스러질때까지 익혔다가 국물과 함께 먹으면 그것만한 명절음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다 낡은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하나 둘 꺼냈다. 뚜껑이 하나씩 열리면서 플라스틱 밀폐용기가 통째로 밥상위에 올라갔다. 언제 먹은 게 마지막인지 기억도 안나는 간장게장과, 할머니가 무친것만 제대로 그 맛이 나는 홍어와 무와 오징어가 빨갛게 뒤섞인 초무침, 그리고 반찬이 수십개가 있어도 절대 빠지면 안된다는 구운 김. 할머니가 맛소금과 참기름으로 직접 바르고 후라이팬에 바삭바삭하게 구워서 일일이 가위로 잘라 비닐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넣어 먹으라고 챙겨주던 김도 밥상위에 올랐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자 할머니는 렌지를 딱 끄고는 커다란 대접을 꺼내 찌개를 펐다. 내가 움직여 옮겨다 드려야지 생각했지만 나는 밥상앞에 딱 붙어 앉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번개같은 속도로 한참을 끓어 적당히 흐느적거리는 미역국을 퍼다주셨다.


"밥은 있구먼."

할머니는 우리집 밥통을 열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밥을 한 고봉 펐다. 그리고 보자기 속에서 숟가락 젓가락도 꺼내서 밥상위에 올렸다.


"어여 먹어."

할머니는 밥상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물어보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엄마는 잘 있는지, 할아버지도 잘 있는지, 할머니는 왜 나 밥을 차려주러 왔는지.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저 먹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간장게장 딱지를 열어주었고, 두부를 건져서 내 밥 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두부를 먹고, 간장게장 딱지에 밥을 비벼먹었다. 그리고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후루룩 먹고, 새콤하게 익은 홍어와 무를 함께 집어 입에 넣었다. 찌개속에 담긴 새우와 무도 함께 떠서 먹었다.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참기름 발라 바삭바삭하게 구운 김을 두장 집어서 밥을 크게 한숟갈 쌌다. 입에 쏙 집어넣는데, 다른 반찬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밥 한그릇을 다 비워갈 때 쯤, 좀 살 것 같았다.


"술 먹지 말어."


할머니는 한마디 툭 던지고는 빙긋 웃었다. 틀림없이 웃었다.

그리고 나는 국물을 너무 많이 먹었나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사방이 깜깜했다.


새벽 한 시 였다. 진짜로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변기 위에 털썩 앉아있는데, 저녁을 얼마 먹지도 않고 물도 거의 먹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오줌을 쌌다. 이건 꿈인가? 이건 꿈이 아니었다. 불을 끄고 방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핸드폰을 켜서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왔다간 흔적이 없었다. 딸아이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전화나 메신저의 흔적도 없었다. 옷도 초저녁에 잠들었던 그대로였다. 클렌징도 하지 못해 얼룩덜룩했다.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초저녁부터 자고 있었고, 새벽 한 시에 일어났다. 그게 팩트였다. 살까 말까 망설였던 샌들을 하나 무이자 할부로 결제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복식호흡을 세 번 정도 하고 다시 일어나니 아침 일곱시였다.


출근을 해서 물끄러미 앉아있는데,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씨의 책이었다. 어제도 이 책을 조금 읽다 말았었는데,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말로 인해 크게 고통받았던 날은 집에 걸어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실은 피 흘리며 기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몸을 돌봐야 한다고. 뇌는 내 자신이 뼈가 부러지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거라고 생각하는거라고. 영양가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마사지 받고, 푹 잘 자야 한다고.


그래서 오셨다 가셨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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