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병욱 Sep 18. 2024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지 않는 이유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SNS의 폐해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 지금 당장 브런치에다가 '퇴사'라고 검색해 보자. 내가 말한 방향성에 부합하는 것 같은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모 방송사에서는 '쉼 청년'이라는 타이틀로 올린 유튜브 영상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영상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잘랐다가 붙였다가 그 영상 하나로 수백만의 조회수를 뽑아내고 있다. 취업이 힘들어진 만큼, 그렇게 힘든 취업 시장을 뚫고 들어간 사람들의 퇴사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자아낸다.


  물론, 잘 계획된 퇴사를 하는 사람도 많다. 퇴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새로운 가능성과 혁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많다. 방황하거나, 포기하거나, 커리어가 꼬이거나... 결국 섣불리 내린 퇴사, 그리고 쉼이라는 선택이 쉽게 감당하기는 힘든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쉼이 이런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쉼 자체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근데...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이 보이더라



공백 제외: 4718자


목차

1. 누군가가 말하는 경험

2. 진짜 경험과 가짜 경험

3. 강한 사람이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강한 거야

- 참고 문헌




1. 누군가가 말하는 경험

  SNS를 보다 보면 '경험'이라는 말을 참 재주 좋게 가져다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낀다.


퇴사 후 해외 한 달 살기, 한 달 세계 여행하기, 다이빙 자격증 취득하기, 유명 페스티벌 참가하기...


  어떤 SNS든 조금만 찾아보면 (단순히 주위만 둘러봐도) 전형적인 SNS식 잘 사는 모습, 화려한 모습의 사진 아래 '새로운 경험, 성장, 발전'과 같은 단어들로 꾸며진 게시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댓글에도 작가의 의도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표현들이 가득하다.


멋있다, 대단하다, 나도 하고 싶다, 부럽다


  틀린 말은 아니다. 멋있는 거 맞고, 대단한 거 맞고, 하고 싶은 것도 맞고, 부러운 것도 맞다. 하지만 말 뒤에 숨은 마음이 작가의 의도와 같은 방향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당장 예시로 든 내용들만 봐도 그렇다. "퇴사 후 해외 한 달 살기"는 마치 유행처럼 유튜브에 그 브이로그만 찾아봐도 수십 수백 개고, 인스타그램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나아가, 여행 유튜버들이 수십억을 번다는 소리가 파다하게 퍼지면서 "여행 다니고, 놀러 다니며 쉽게 돈 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발에 차인다. 누군가는 그럴싸하게 포장까지 해둔다.


새로운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가는 거예요


  멋진 말이다. 이유가 있고, 근거만 있다면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맹목적으로 좇을 필요는 없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산업에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위대한 것도 없다.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결과가 어떻든, 일단 다니기 싫은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다는 그 해방감, 다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변명을 들이밀고, 새로운 산업에 도전한다는 멋진 자기 모습에 취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사직서를 들이밀고, 두 어깨 펴고 당당한 모습으로 백수의 삶을 그려낸다.


출근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지금 당장 얼마 벌지도 못하는데 미래를 고민하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게 하나도 없어서 지금 쓸 돈도 없는 것 같은 이 결과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도망가고 싶고...


  굳이 새로운 산업에 도전한다는 핑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경험'이라는 단어는 마법과도 같아서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저 지금 당장 일하기 싫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벗어던진 채 돈만 펑펑 써대려는 도피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젊을 때 해야지 언제 하냐?'라는 말은 성 주위에 둘러친 단단하고 든든한 성벽처럼 그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최소한 20대와 30대, 그리고 그들의 SNS 속에는 이런 도피 경향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몰라도, 매주 한 번쯤은 번아웃이 온다며 (감기보다도 더 잘 걸리는 것 같다) SNS에 올려 공개 위로를 바라고,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경험이라며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놀러만 다니는 것 같더니, 언제는 또 장문의 글을 올려 '힘들다, 직업이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라며 하소연과 한탄의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소한 내게는) 돈이 어디서 그렇게 새어 나와서 정수기에 물 따르듯 쭉쭉 뽑아 펑펑 써대는지 궁금할 따름일 뿐, 글쓴이가 '글자로 전하는 표면적' 아픔과 고민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 사람들은 얼마 안 가 퇴사를 선언하고, 일시적인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놀고 싶은 대로 논다.


안 될 것 같으면 때려치워야지!


  어쩌면 효율적이고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건 '자가 진단'이라는 말 그 자체다. 진단에는 (핑계가 아니라) 근거가 필요하다. 고민 없이 내린 결정은 그저 생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걸 확인해 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래서 목적이 뭐죠? 그걸 위해 얼마나 준비하셨죠?


2. 진짜 경험과 가짜 경험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가장 만만한 나라가 바로 동남아권이다. 날씨 적당하고, 여행객이 많아서 언어적 장벽이 높지 않고, 한국 여권으로 무비자 지역에다가 가장 중요한 건 물가가 저렴하다. 그럼,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달 살기를 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가장 가깝고, 무비자 국가에, 물가까지 저렴해서 한 달 살기 나라로 꽤 손꼽히는 태국으로 한 달 살기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해외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한 달 동안 태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현지 문화를 파악하실 건가요? 미래에 태국에서 취업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태국 사람과 친분을 다져야 할 일이 많으신가요? 태국에 거래처가 있습니까? 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연수를 간 건가요?


  한 달 살기를 결정한 사람 중에 위 내용 중 하나라도, 비슷한 결이라도 고민해 봤던 사람이 있을까? 결국 '한 달 살기는 귀중한 경험이다'라는 핑계로 한 달 동안, 자기가 번 돈인지, 부모님이 번 돈인지 분간할 수도 없는 수십 수백만 원을 '이때 아니면 언제 쓰겠어, 물가도 저렴해서 정말 좋다'라며 부담 없이 물처럼 쓰는 시간일 뿐이다. 그게 왜 좋은 경험인가?


태국 유명 관광지에서 인생샷 남기기, 태국 코끼리 밥 주기, 저렴한 열대 과일 많이 먹기, 방콕, 푸껫, 파타야, 치앙마이 놀러 가기, 현지 오토바이와 택시 타보기...


  이런 경험은 속되게 말해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시간과 돈만 있으면 아무나,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경험이다.


경험은 많이 하는 게 좋다고 했어요! 시간 있을 때 해야죠!


  맞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글에서 말하고 싶은 말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좋은 경험과 별 볼 일 없는 경험의 차이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기인한다. 회사를 바쁘게 다니고, 회사에서 인정받고, 회사에서 일하고, 회사에서 고민하고, 그러는 와중에 한 달 살기라는 텀을 만들어 냈다면 그건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냥 '돈을 쓰고 놀겠다'며, 퇴사해서 '경험, 젊음' 핑계를 대고 돈 쓰러 다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회사를 다니는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아무런 가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회사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회사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소모되는 부분이 많다. 회사에 모든 삶을 매몰시키지 않더라도, 적당한 삶의 균형을 찾았더라도, 쉼과 일의 간극을 아무리 잘 조절했어도 회사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짧은 순간들을 다시 조정하고 모아서 다른 개인적인 목표를 이뤘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난 이게 진정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안 다녀본 사람, 혹은 짧게 다니다가 때려치운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했을 뿐이다. 하지만 회사는 그렇지 않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규칙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매번 새로운 도전이 눈앞에 던져진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줄 하나를 긋자고 약속한다면 얼마 안 가 흰 종이를 검게 물들여버릴 것이다. 그만큼 회사에 다닌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지옥의 쳇바퀴에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다음 한걸음에 대한 고민과 선택 없이 그저 제동만 걸어대는 걸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 달 살기를 예로 들었을 뿐, 퇴사하고 쓰는 모든 행동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것들이다. 세계 여행을 가든, 별 쓸데없는 자격증을 따든, 있어 보이는 페스티벌에 놀러 가든,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돈을 써대기만 하는 행동들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이다. 최소한 난 그렇게 생각한다.


3. 강한 사람이 버티는 게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강한 거야

  회사 일이 너무 바쁠 때면,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을 때면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진짜 딱 한 달만 나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다


  자유가 딱 한 달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좋겠다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도록, 지금 해야 할 거 찬찬히 정리할 수 있도록 제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회사 일이 안 풀릴 때면 이런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난 확실히 알고 있다.


회사에 다니고 있기에, 시간이 없기에, 그 시간을 쪼개서 살고 있기에 비로소 지금 하는 모든 '하고 싶은 일'이 가치 있다는 것을


  만약 내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갔다고 가정해 보자. 회사에 다닐 때는 목적도, 준비도 다 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현실은 차갑다. 노트에 계획서라며 삐뚠 글씨체로 제목 한번 적어보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상상해 봤던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많이 다른 현실에 좌절하고 가슴 아파할 일만 남겨 주는 게 바로 현실이다. 그리고 그걸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자영업이 왜 자영업인가? 당신이 하고 싶은 건, 한 만큼 벌 수 있고 하지 않으면 1원 한 푼 벌 수 없는 자영업인가? 여행을 경험이라며 울부 짖고, 퇴사해서 백수로 사는 걸 새로운 삶으로 외치는 그 사람들의 꿈은 분식집, 고깃집, 치킨집 등으로 대표되는 요식업 사장인가? 미래에 그리던 모습이 바로 그것인가?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많다. 정말 일하기 싫고, 다른 사람 일하는 꼬락서니 보면 한숨이 나오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이것보다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내고,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엑셀을 켜서 하고 싶은 일과 하는 일의 경제적 가치를 비교해 보자. 얼마의 시간을 쏟아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으며, 또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블로그로 10만 원을 벌었고, 유튜브로 100만 원을 벌었다고 한들, 회사라는 기본이 있어야 그게 '자신을 빛낼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지, 퇴사한 뒤에는 그냥 최저임금 보다 낮은 금액을 버는 '저소득자'일 뿐이다. 최소한 난 그렇게 생각한다. 회사에 다닌다는 건, 여느 영 앤 리치 (라고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SNS 작가들이 포기하고 도망친 환경에서 성장의 기회를 찾는 일이라고 말이다.


10분 투자로 천만 원 버는 법!
AI로 자면서 1억 벌기!
여행하면서 유튜브로 성공하기!
회사 당장 때려치우세요! 대기업 퇴사자의 성공 비법!


  난리가 이런 난리도 없다. 10분 투자로 천만 원을 벌 수 있으면, 그게 최소한 짧은 요행이 아니라면, 글쓴이가 직접 하면 된다. 그럼, 그 사람은 바보라서 귀중한 정보를 무료로 나눠주나? 결국은 그 영상의 조회수로 돈 천만 원을 버는 게 바로 그 사람의 비즈니스 모델 아닌가?


  회사는 생각보다 많은 걸 가르친다. 그냥 혼자서 마음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싫은 사람과 협업하는 방법, 사람들과 적당한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정해진 규칙 속에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방법, 이룬 성과를 정당하게 발표하는 방법, 좋은 사람에게 물질로 표현하는 방법, 윗사람을 대하는 예절, 아랫사람을 감싸는 포용력 등 다양하고도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기술과 지식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시간이 필요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가장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속한 환경에서 도망치지 않고, 버티고, 또 버티고, 또 또 버티면서 그 와중에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들, 난 그 사람들이 가장 대단하고 멋진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이게 바로 진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버티는 사람이 강하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꼴에 나이 좀 먹었다고, 회사 생활 좀 해봤다고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더라.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참고 문헌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랜서 번역가로 살아가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