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그게 바로 내 ‘개성’이다
해당 글은 단편 소설의 한 부분으로, 1화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 화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띠띠띠... 띠리링”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도착한다.
“하, 갑자기 비가 올 줄은 몰랐네”
집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올 무렵부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갑자기 퍼붓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비추는 도로 위에 하얗게 물보라가 일고, 어두컴컴 보이지도 않던 아스팔트는 순식간에 젖은 수의처럼 축 처진 채 어두운 빛을 머금는다.
피할 곳도, 뛸 힘도 없었다. 그저 발걸음을 느리게 옮길 뿐이었다. ‘그래, 쏟아봐라... 마음대로 해라’라는 식의 체념처럼 말이다. 가방은 빗물을 잔뜩 머금은 채 늘어지고, 셔츠도 피부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이 휘감아오고, 머리카락은 이마에 들러붙는다. 몸이 젖은 건지, 마음이 젖은 건지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사실 비는 그런 존재다. 다 젖고 나면 오히려 무감각해진다. 이미 이런 회사 생활에 적응한 나처럼... 그래서일까, 이 비가 마치 내가 느낀 서운함, 외로움, 억울함 그 모든 걸 대신해 울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 진짜 엉망인 하루네. 근데 내일은 더 힘들겠지...”
목은 뻐근하고 온몸이 쑤신다. 편의점에서 잠깐 앉아 쉬지도 않았다면 분명 길 한복판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만난 박 씨의 모습이 자꾸만 맴돈다. 말없이 고개를 든 그 눈빛, 담담하고 묵직한 그 침묵. 마치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
생각해 보면 내가 무시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늘 눈에 띄고 싶어 했고,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눈에 띄지 않게, 눈에 들지 않게, 조용히 사라지는 법을 배우며 버티고 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잊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마주하게 됐으니까.
‘그래도 나보단 낫지, 속 편하잖아’
피곤한 몸을 소파에 던지고,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잡는다.
“됐어, 오늘도 아침까지 일해야 할 것 같은데... 야식이라도 미리 시켜놔야겠다”
누가 길이라도 정해둔 것처럼 손가락이 가장 익숙한 메뉴를 찾아 움직인다. 사실 입맛도 별로 없다. 허기진 몸을 채우지 않으면 무너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더 클 뿐이다.
‘내일도 이렇게 버티면, 내가 원하는 성공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의심이 밀려온다. 하지만 익숙하게 마음 한구석에 묻어버린다.
‘계속 달려야지,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안 남아’
경쟁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뒤처지면 끝이라는 걸,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어릴 때 누군가는 ‘개성을 키워야 한다’라고 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색, 나만의 꿈을 찾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현실은 항상 똑같은 틀에 맞추길 강요했다. 시험 점수, 수행 평가, 봉사 시간, 대회 수상 경력... 결국엔 남들보다 몇 점 더 잘 받는지가 중요했다. 난 개성이 어려웠다. 개성이 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개성보다는 성적을, 나다움보다는 순위를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더 많이 해내는 법을 익혔다. 그러자 칭찬이 돌아왔다.
“애가 똑똑하네”
“너희 부모님은 좋겠다”
“큰 사람 되겠는데?”
이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시키는 대로, 틀에 박힌 대로... 경쟁하고, 이기고, 지지 않기 위해 애썼더니 좋은 학교, 좋은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거다. 이 코스를 뛰는 내게 ‘나다움’ 같은 건 사치였다. 감히 ‘내가 뭘 좋아하는지’ 고민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학교에서 개성적인 친구들은 문제아가 됐고, 회사에서 개성적인 사람들은 분위기를 흐리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난 배웠다. 이 세상에서 ‘개성’은 독이 든 성배라는 걸.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 전에 이미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내 모든 개성과 자존심은 벽돌처럼 쌓여갔다. ‘성공’, 그게 바로 내 ‘개성’이다. 나 자신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래야 내가 이 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머릿속에선 ‘너답게 살아라’라는 어린 시절의 목소리와 ‘회사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현실의 망령이 싸운다. 두 목소리 사이에서 난 점점 희미해져 간다.
‘하... 이게 맞겠지?’
뱉어보지도 못한 말 한마디가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니, 맞아.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짓 밟힐 수 없어’
그게 지금의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