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숫자’로 바꾸는 곳
해당 글은 단편 소설의 한 부분으로, 1화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 화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저 남자의 말에 대답할 필요도, 변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대신 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쓰레기봉투를 집어 올린다.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근원이 사라지진 않는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계속 메아리친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걱정도 없고...’
익숙하다. 아니... 낯설지 않다. 난 수도 없이 이런 시선을 받아왔다. 그런 시선, 그런 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유독 마음이 시리다. 어쩌면 나도 한때... 저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엘리트 전무님 밑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게 큰 영광 아니겠습니까?”
어릴 땐, 아버지가 자랑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기세 좋게 퇴근하는 모습, 사람들을 쩔쩔매게 하는 말투, 나에게 성공이란 바로 ‘아버지’ 자체였다. 그런 아버지는 늘 말했다.
‘사람 위에 서야지, 남들 발밑에 깔리면 안 된다’
그 말이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버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게 무슨 뜻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 세상은 보이는 사람만 기억한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으면, 아무리 고생해도 ‘없던 일’이 된다는 걸. 그래서 난 다짐했다. 절대 잊히지 않겠다고, 항상 누군가의 위에 서 있겠다고.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를 발표하던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그날도 며칠 밤을 새우고, 비상대책 회의까지 마친 직후였다고 한다. CCTV에는 아버지가 프레젠테이션 리모컨을 쥔 채 그대로 무너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군가 놀라거나 소리치는 장면은 없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마치 다음 말을 이어줄 사람이 없어진 대본 속 장면처럼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 직원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의식이 없는 채로 병원에 누워있게 됐다. 난 거의 매일 병원에 들렀다. 정장을 입고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아버지는 더 이상 ‘기세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말도 못 하고, 눈도 못 뜨고, 기계에 의존해 숨만 쉴 수 있는 그런 존재 일뿐이었다.
그렇게 누군가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을 때 회사는 빠르게 움직였다. 아버지 책상 위의 이름표는 조용히 치워졌고, 사무실 자리도 ‘임시 담당자 자리’라는 명목으로 정리됐다.
‘전략본부 전무직 인사 발령’
이 주쯤 지나고 날아든 날카로운 메일 한 통이 마지막 남은 아버지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아버지와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회식 자리마다 옆에 앉아 술을 따라주던 사람이 차지했다. 인사 발령이 났던 날, 그 사람은 친히 병원까지 찾아와 날 보고 웃었다.
“선배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안타까워요. 그래도 자리를 비워둘 순 없으니까요. 회사도 너무하네요, 그렇죠?”
그 말을 들었던 날, 난 병실 문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뒤, 기적처럼 아버지는 눈을 떴다. 하지만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변했다. 등을 똑바로 세우고 걷지도 못했고, 한참을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어느 날 난 용기 내 아버지께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아버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자리였어요?”
아버지는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긴 침묵이 병실을 삼키려는 순간, 겨우 한마디를 해 주셨다.
“난 절대 짓밟히지 않아”
그 순간, 난 알았다. 내가 평생 동경해 왔던 그 모습이, 사람 위에 서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몸부림이 끝난 자리엔 그 어떤 존엄도, 명예도 남지 않았다는걸.
그날 이후, 난 엘리트라는 말이 싫어졌다. 사람 위에 서는 걸 목표로 삼는 그 구조 자체가 역겨웠다. 누군가의 실패가 누군가의 성공이 되는 세상... 그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아니었다.
“야, 너 진짜 그거 포기한 거야? 해외 MBA까지 지원해 준다며?”
“응, 안 갈 거야”
“미친 거 아니냐? 누군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사실, 나도 그게 뭔지 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누군가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젠 누군가를 붙잡는 자리에 서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작고 하찮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을 위하는 자리’라면 내가 설 이유가 된다고 믿었다. 매일 아침 깨끗한 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쓰레기통 옆에 놓인 박스를 먼저 나서서 치우는 사람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나아지게 만드는 일... 그건 숫자로 환산되지는 않지만, 확실히 ‘사람’을 위한 일이다.
날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 도시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깨끗한 길을 걸으며 안심하고, 누군가는 불편함 없는 출근길에 감사하고, 또 누군가는 아이 손을 잡고 걷다가 무언가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곁에 존재한다.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하루를 책임지는 ‘세상’이 된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회사는 사람을 ‘숫자’로 바꾸는 곳이었다. 난 그 숫자를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내가 그저 반사 조끼를 입은 청소부일지 몰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나라는 존재가 그날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믿는다. 눈에 띄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난 세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