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하루를 ‘살아졌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 삶
해당 글은 단편 소설의 한 부분으로, 1화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 화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근데 배달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잡생각을 털어내고 보니 벌써 새벽 한 시 삼십 분이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배달이 안 오는 건 이상하다. 갑자기 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하... 진짜...”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다. 몇 번이고 들었던 녹음이 짜증을 더 돋운다.
“상담사는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됩니다.”
익숙하게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간다.
“여보세요? 지금 주문한 지 한 시간 반이 넘었는데도 배달이 안 왔거든요? 빨리 좀 확인하고 처리해 주실래요?”
내 목소리가 조금 올라간 걸 안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회사에선 한마디 못 하고 앉아 있었으니까. 여기서라도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해야 하니까.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가게 쪽이랑 연락이 안 되고 있어서 저희도 확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또 기다리라고요? 하... 지금 이거 기다리느라 날린 시간이 얼만 지나 알아요? 이 한 시간이 얼마짜린 줄 아냐고요! 당신들이랑 가치가 달라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말을 잇기 전, 아주 작게... 숨을 가다듬는 듯한 소리다. 그 작은 침묵이 날 조금 더 불편하게 만든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환급 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 따로 보상 쿠폰도...”
그 한마디가 불편함을 승리감으로 바꾼다. 적어도 이 대화에선 내가 이겼다.
“됐어요, 짜증나게...”
전화를 끊고 소파에 앉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쥔 휴대전화에 환급 완료 메시지와 함께 쿠폰 1매 지급이라는 안내 알림이 뜬다. 피식 웃음이 난다. 돈도 돌려받고, 쿠폰도 생겼다. 이 정도면 잘 처리된 거다.
“똑똑”
새벽 두 시 반이 넘은 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키보드 소리로 가득 찼던 방의 침묵을 깨뜨린다.
‘뭐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쭈글쭈글한 비닐봉지를 든 배달 기사가 날 맞이한다. 점퍼는 비에 젖어 있고, 얼굴 한쪽은 긁힌 자국이 가득하다. 모자는 축 늘어져 한쪽 눈두덩이의 멍 자국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모습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조금 늦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요. 근데 음식을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서...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바로 환급 처리 해드리겠습니다...”
잠깐 당황하지만, 곧 무표정하게 봉지를 받는다.
“아... 예”
문을 닫고 돌아서자, 순간 아주 작은 불편함이 스친다.
짜증 난다.
난 불합리한 배달 시스템에 정당한 소비자로서 화를 냈고, 당당하게 보상을 쟁취했다. 근데 왜... 불편하지?
조금 전, 문 앞에 선 그 사람은 어쩌면 이미 환급 처리가 끝났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딘가에 긁힌 얼굴로, 온몸이 젖은 채로... 음식을 들고 고객을 찾아왔다. 환급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객이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하...’
음식 봉지를 바라본다. 젖은 비닐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단순한 수증기가 마치 내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사람의 체온 같다. 그가 끝까지 배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날 불편하게 만든다. 이건 죄책감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 대한 침묵의 고발이다.
누가 더 사람다운가? 누가 더 승리하였는가?
지금까지 난 보이지 않기 위해 살았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회사에서 버티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런데 문 앞에 선 그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를 한 건의 배달을 위해 비를 뚫고 왔다. 얼굴에 멍이 들고도, 돈 따위 단 한 푼 벌지 않고 사과만 남기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왜... 왜!”
짜증 난다. 화가 난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다. 발표고 뭐고 갑자기 모든 게 싫어진다. 왜 날 이렇게 짜증 나게 만드는 걸까. 왜 날 이렇게 화나게 만드는 걸까. 왜! 왜! 왜! 왜 날 이렇게! 왜 나만 이렇게!
‘왜 나만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야...’
아침마다 출근길에 폐가 눌린 것처럼 숨을 참고, 감정을 꼭꼭 눌러 담은 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든 말을 걸러내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마치 존재조차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 삶. 나 자신을 조금씩 지우고 또 지워서,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투명 인간이 되면서까지 간신히 하루를 ‘살아졌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 삶.
‘근데 저 사람들은 왜...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까지 살아내는 거야..’
몸은 다치고, 마음은 무너지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고, 욕설이 섞인 말 한마디에도 상냥함을 놓지 않고, 빗속을 뚫고, 얼굴이 멍들어도 누군가 기다릴까 봐 음식을 안고 서 있는 저 사람들을... 세상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쓰레기를 줍는 손, 욕을 듣는 전화 너머의 숨소리, 문 앞에 조용히 놓인 젖은 배달 봉투 하나, 그런 사람들을 세상은 절대 기억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어떤 존재도 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부르지 않아야만 한다...
아니면... 내가 진 것 같은 이 기분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난 이겼다. 분명 이겼다. 세상의 규칙을 이해했고, 시스템을 이해했고, 그렇게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최고의 기업에 들어왔고, 정글과도 같은 야생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언제나 정당하게, 항상 합법적으로, 내 권리를 당당히 쟁취해 나갔다. 그렇게 마땅한 보상을 받아왔다. 근데 왜... 이 젖은 봉투 하나가 이토록 무겁게, 끈적하게, 내 손을 타고 죄책감처럼 흘러내리는 걸까...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왜 억울하지도 않은데 목이 잠기지. 대체, 누가 이긴 거지? 저 사람들이 졌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지?
저 사람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자신이 옳다고 외치지도 않았다. 묵묵히 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난, 세상의 눈을 원하면서도 오히려 세상의 눈을 피했다. 화려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전시했지만, 정작 내 삶은 점차 투명해졌다. 그저 ‘살아졌을’ 뿐이었다.
이런 삶이 정말 ‘성공’으로 가는 길이 맞는 걸까?
어쩌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구차한 ‘성공’도 성공으로 포장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괴롭다.
그래서 화가 난다.
그래서 난...
내가 너무 부끄럽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