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으나 사라져 가는 흔적
해당 글은 단편 소설의 한 부분으로, 1화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 화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시간은 아낌없이 흐른다. 단 한 줌도 잡히지 않고 빠르게 흘러간다.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하루가 쉼 없이 흐른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지금은 익숙한 척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나도 먼저 묻지 않는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같은 질문은 초반에나 몇 번 던져보다가 그냥 관뒀다.
“하... 레퍼런스 체크 안 했어요? 들어온 지 몇 달 됐으면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나? 바빠죽겠는데 진짜...”
모두가 바쁘다. 난 그 바쁨을 방해하지 않는 걸 배웠다. 회의 시간에는 말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게 됐고, 보고서는 틀리지 않게만 쓰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조용한 사람을 편하게 여겼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은 실수해도 그냥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줄였고,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이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게 있다면, 그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다. 최대한 조용하게, 빠르게, 정확하게,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난 점점 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
“끝났어?”
정장 외투를 걸친 채 서류 가방을 든 정 부장이 내 자리를 지나가며 한 마디를 건넨다.
“...아니요, 조금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의는 내일 아침이야, 제대로 정리해 와”
“네, 알겠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똑같은 질문... 이젠 당황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은 익숙하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날 스쳐 간다.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지금 뭘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사치스러운 생각은 금세 다시 익숙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던 걸까? 그게 오늘이었는지, 어제였는지,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르겠다. 출근길에 들었던 음악도, 점심으로 먹은 메뉴도, 회사에서 지나치는 얼굴들도 모두가 겹치고 또 반복된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하나의 선이 아니라 고리처럼 느껴진다.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똑같은 회전 속에 묶여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돌아가다 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건지도 잊게 된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말, 이미 지나간 듯한 순간들. 데자뷔처럼 겹친 하루들 속에서 난 지금도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이곳이 시작인지 끝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난 지금... 뭘 하는 걸까.
시곗바늘이 열한 시를 가리킨다. 시간도 모르고 분주하게 사무실을 채우는 키보드 소리에 반쯤 몸을 숨기듯 문을 나선다.
‘가자...’
현관 센서가 작동하며 천천히 자동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문에 비친 내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유리 너머의 바깥세상은 아직 밤의 냉기를 품고 있고, 유리 안의 나는 하루의 무게를 고스란히 머금은 채 힘없이 매달린 모습이다.
문이 열릴수록 유리 위에 맺혀 있던 내 얼굴도 점점 흐려진다. 왼쪽 어깨, 왼쪽 눈썹, 턱선, 입술... 순서대로 사라져간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얼굴도, 자존심도 투명하게 지워진다. 마치 오늘 하루 동안 이 회사에서 지워져 간 내 존재 같다.
바람이 분다. 예상보다 훨씬 차가워진 공기가 내 살결을 스친다. 잊고 있던 배고픔도, 발끝부터 차오르던 피로도...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적으로 몰려든다. 익숙하게 탈색된 풍경이 날 맞이한다.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 하나를 사서 편의점 앞 의자에 앉는다. 손에 든 캔의 미지근한 온기가 오늘 하루 동안 내게 허락된 따뜻함의 총량 같다.
‘아, 배고프다’
편의점 유리창에 한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눈 밑은 퍼렇게 꺼져있고, 입술은 말라붙은 채 건조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첫 출근을 맞이했던 ‘나’가 이 얼굴을 봤다면 놀라 나자빠졌을 것이다.
‘좀 걷자...’
그렇게 난 사람 많은 버스를 피해서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아무 말 없이 골목의 정적에 섞여 걷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차가운 바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집으로 가는 길만큼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눈빛을 받아내는 건 회사에 있을 때만으로 충분하다고. 성과를 내야 하는 톱니바퀴, 실수하면 교체될 부품, 그러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그게 회사에서의 나니까.
‘오늘도 밤을 새야겠지...’
고민에 치여 갈 길을 잃은 시선이 길가에 쌓인 쓰레기봉투로 향한다. 누군가 고개를 숙인 채 검은 봉투를 집어 든다. 녹색 빛을 반사하는 조끼, 하얀 작업모, 아직 새것 같은 장화...
“이런 시간에도 청소를 하나?”
작게 중얼거렸지만, 생각보다 입이 크게 벌어졌는지 쓰레기봉투를 주워 들던 사람이 고개를 든다. 반사 조끼에 붙은 명찰이 살짝 흔들린다. 박... 이름 세 글자를 다 읽기도 전에 다시 그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쓰레기를 집어 든다. 그 순간, 반사 띠에 적힌 선명한 검정 글씨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 순간,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다.
“하... 나도 저렇게 살 걸 그랬나.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걱정도 없고...”
바쁘게 움직이던 쓰레기 집게가 잠깐 멈칫한다. 그리고 박 씨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려 날 쳐다본다. 어둠 속에서도 눈빛이 느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 씨의 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에서 뚝 하고 뭔가가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묵직한 체념인지, 익숙한 무시였는지, 아니면 오래된 자존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 모습에 대해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