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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노력의 결실

내가 생각한 ‘성공’의 첫 단추

by 병욱

해당 글은 단편 소설의 한 부분으로, 1화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전 화를 읽어보고 오시면 더욱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야! 너, 그래서 이거 언제 다시 갖고 올 거야”


정 부장의 목소리가 날 다시 현실로 불러온다. 흩어진 서류를 추스르고 겨우 고개를 든다.


“예… 다시 해보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가 아니고, 해놓으라고. 회의는 내일 아침이야. 네가 발표할 거니까 제대로 정리해 와”

“네…”


발표? 누가? 내가? 오전부터 주어진 자료만으로 죽어라 만든 게 바로 그 서류였다. 컨설팅 초안, 데이터 정리, 경쟁사 분석까지. 오전 10시에 자리에 앉았고, 점심은 커피 한 잔으로 때웠다. 사무실에 들어선 지 여섯 시간도 안 됐는데, 지금 난 하나의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업무 공유도, 회의도 없었다. 그냥 “이거 네가 맡아” 한 마디가 전부였다. 난 내가 똑똑해서 여기 들어온 줄 알았다. 근데 지금은… 계속 ‘무식하지 않은 척’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니, 난 할 수 있어. 첫날이잖아, 혼 좀 났다고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되지. 여기서 열심히 해서 내 가치를 제대로 증명하는 거야’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문서 파일을 다시 열고, 피드백을 받은 부분을 수정한다. 그래, 이런 것도 결국 다 과정이다. 살짝 내가 예상한 상황이랑 달랐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적응할 기간은 필요하니까.


밤을 새워 자료를 다듬고, 발표 준비를 마친다. 정 부장이 지적한 부분을 최대한 반영했고, 경쟁사 데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확인하고 교차 검증까지 했다. 완벽하다.


‘좋아, 이정도면... 정 부장한테 칭찬받는 거 아니야?’


입이 씰룩거리기 시작한다. 언제 혼났냐는 듯, 내일 아침 회의실 문이 열리는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이 정도면 잘했네. 거 봐,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잖아’

‘신입 맞아요? 진짜 일 잘하네’


그럼 다른 팀원들도 날 한 번쯤 더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날 ‘인정’하게 될 거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이런 상상을 하며 마지막 슬라이드를 다시 열어보고, 문구 하나하나를 되짚는다. 혹시라도 흠 잡힐 구석은 없는지 다시 확인한다.


회사에서 칭찬받는 일, 어쩌면 그게 내가 생각한 ‘성공’의 첫 단추일지도 모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까지 남아 일한 건,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린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다. 인정받고 싶다. 이런 욕심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당연한 거니까. 나도 사람이니까.




화면을 공유하고, 천천히 발표를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축축하게 젖어버린 손바닥과 달리,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하다. 정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에 참석한 다른 팀원들도 화면에 집중한다. 나쁘지 않다. 슬라이드를 넘기고, 자료를 설명하고 질문에 답한다. 몇 번 말을 더듬기도 했지만, 큰 무리 없이 넘어간다.


“...이상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약간의 정적이 회의실을 감싼다. 그 짧은 정적 속에 온갖 기대가 쌓여간다.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뛴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까, 정 부장일까, 아니면 강 과장일까.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그런 한 마디면 충분하다. 어제 혼난 것 정도는 사소한 일로 넘어가게 될 거다.


“음... 강 과장, 자료 검토하느라 고생했어. 깔끔하게 잘 정리했네. 특히 경쟁사 분석 파트는 확실히 시니어들의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게 느껴져. 회의 끝나고 파트장님한테 공유할 테니까, 자료 정리해서 넘기고”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어...?’


정 부장은 끝까지 내 이름을 꺼내지 않는다. 모든 자료는 내가 다 준비했는데, 칭찬은 자연스럽게 강 과장에게로 넘어간다. 누구 하나 정정하지 않는다. 나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나와 시선을 마주쳐 주지 않는다.


아, 나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런 건 인턴 때부터 자주 봐 왔던 장면이다. 단지 그땐 무시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차피 그때의 난 경력 한 줄 예쁘게 달아놓고 나갈 사람이었으니까. 그 세계의 규칙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내가 그 규칙 속에 들어와 있다. 회사에서 원하는 건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다. ‘잘 보이는 사람’이다. ‘노력하면 된다’라는 말은 조용하고도 예의 바른 거짓말일 뿐이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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