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엄마를 보지도 못했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나는 개점휴업 상태의 교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선 풍경이 되던 그 시절, 아이들이 없는 교실은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은 교실을 교실답게 하는 온기였던가. 빈 의자 30개를 앞에 두고 보지도 못한 우리 반 아이들을 그리워하던 시간들.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온라인 입학식을 해야 했고, 봄이면 늘상 하던 학부모 상담도 하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나의 여덟 살 아이
너에게 내가 해줄 것이 없어서
우리 둘이 꼬옥 안고 울기만 했다
여덟 살 설움이 나를 덮친다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한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아이의 엄마는 몸이 아파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면서 아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너무나 기력이 없어 보여 그리 긴 통화는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을 무렵, 우리 지호(가명) 잘 부탁드린다는 울먹이는 목소리. 그게 아이의 엄마와 나누었던 첫 대화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아이의 엄마는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고 하였다. 아이는 엄마가 그냥 좀 아픈 줄 알고 있는데 곧 엄마랑 이별을 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며칠 뒤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의 엄마가 떠나셨다고.
나는 아이의 얼굴도 모르는 채로 아이 엄마의 장례식에 가야 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아이를 마주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아이는 제 형이랑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소개해주자 슬쩍 아버지 뒤로 숨어들지만 제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은 슬쩍 비치는 얼굴이었다. 난 그날 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와 첫 만남 이후. 이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며 교육시스템은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홀수 번호, 짝수 번호 아이들이 교대로 학교에 등교하여 교실 내 밀집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그렇게 그 아이와도 하루 건너 한 번씩 만나며 1학년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잘 챙겨주셨다. 아이는 아빠랑 등하교를 하였다. 엄마와 함께 오가는 다른 친구들을 바라보는 아이는 제 표정을 감추고 말이 없었다.
낯선 학교생활을 낯선 방법으로 시작한 아이들은 하교 시간에 저 멀리 엄마가 보이면 제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고 엄마를 부르며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가 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항상 조금씩 늦게 오셨다. 아이의 아버지를 기다리며 나는 아이랑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나의 사소한 질문에도 아주 깊은 생각을 하는 듯 항상 대답이 늦었다. 그러다 먼발치에 아버지가 보이면 이 아이도 역시 나를 버리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 정말 마음 짠한 부자간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하교 시간을 맞추지 못하여 한참을 둘이서 아빠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더 아이가 너무 우울해 보였다. 아빠가 늦어서 불안한 걸까?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어 괜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불안을 달래주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정말 한참을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우는 이 아이. 한참을 울었다. 우는 아이들 두고 나는 어떤 것도 묻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묻는 말에도 늘 대답이 늦던 아이는 평소와 다르게 폭탄을 터뜨리듯 스스로 말문을 열었다.
아빠가 밉다고.
엄마가 있는 병원에 가고 싶었는데
아빠가 엄마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고.
자기는 엄마를 보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가버렸다고.
이제 나는 어떡하냐고.
아빠 때문이라고, 아빠가 밉다고 소리 내어 우는 이 아이.
차라리 하늘나라로 떠난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했으면 덜 기가 막혔을까. 마지막 순간의 엄마를 못 만난 설움을 토해내는 이 아이. 그야말로 토해내듯 하소연하는 여덟 살 아이를 안고 나는 같이 우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냥 아이의 등을 쓸어주는 일 밖에 할 것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엄마가 원했던 일이라고, 병으로 흉해진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아이가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아이에게 예쁘고 건강했던 엄마의 모습만 남겨주고 싶었다고. 그런 아내의 마음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자라고 있을까. 말도 없던 그 아이가, 여덟 살 그 아이가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을 그 작은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터지던 그날. 그저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으면 그 아이가 여덟 살 아이처럼 느껴졌을까?
마지막 엄마를 못 보아서, 그래서 자기는 어떻게 하냐고 목놓아 울던 그 아이는 여덟 살 같지 않았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여 한탄하는 어른이 된 자식 같은 모습. 그 아이는 나에게 그렇게 기억되었다.
교사는 아이의 상처에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슬픔을 해석해 주는 것이 옳은가, 그냥 함께 울어주는 것이 옳은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아이의 부모의 판단을 재단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아이를 정말 위하는 일이었는지 생각해 볼 뿐.
여덟 살 어린 아이지만
아이에게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용기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나았을까.
아니면 아름다운 엄마의 기억만 남겨주려고 이별의 순간을 주지 않는 것이 나았을까.
살아가는 내내 아이에게 어떤 선택이 그나마 나았을지...
그날의 북받치던 울음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아이가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지, 문득문득 마음이 쓰인다.
그저 아무것도 해줄게 없는 교사로서 물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선택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친구를 보며
형님들을 보며
선생님을 보며
느끼고 생각하고 변화한다
그러면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