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 이야기
초성자음 <ㅆ> 소리가 나는 낱말은 뭐가 있을까?
조그맣고 어여쁜 입으로 '쏘주'와 '싸다구'를 말하는 아이들. <ㅆ>계의 아이돌, <ㅆ>으로 시작되는 대표적인 욕은 화룡점정이 된다. 여덟 살 인생에 이미 요런 낱말들이 머릿속에 들어있다니. 타고나길 근엄한 교사가 못 되는 나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가끔은 또 고상한 어휘를 장착한 아이도 있기 마련. <ㅁ>받침 공부를 하다가 한 아이가 <감동>이라는 낱말을 찾아냈다. 우리 다른 무식쟁이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들과 <감동>이 무슨 뜻인지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이 여덟 살의 언어 세상은 다른 친구들을 꼬마작가의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되었다.
감동은 마음을 움직이는 거야.
사랑한다는 말이
너의 마음을 몽글몽글 만들듯
미안하다는 말이
마음속 고드름을 녹이듯
그림책 속 이야기가 내 마음에 스며들듯이.
너희들도 마음을 움직이는
꼬마작가가 되어볼래?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그렇다. 나도 감동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글 쓰는 사람이 그렇게 멋지고 부러웠다. 하지만 작가는 못 되고 교사가 되었으니 나의 이 못다 푼 한을 아이들에게 풀어내고 있었다. 일단은 외계어를 쓰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면 이제는 간단한 문장 공부. 아싸! 드디어 나는 본색을 드러낸다. 이때를 기다려온 듯이. 간단한 문장이 서로 맥락을 갖고 이어지면 글이 되는 것. 우리 반 2학기 국어 시간은 꼬마작가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항상 재미있는 소재는 똥 아니면 방귀다. 그저 똥 얘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웃으니 우리 반 국어 시간에는 똥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재밌는 소재는 아이들의 배움을 이끌어 주는 견인차가 된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어떻게 탈출할 거니?"라고 물어보며 <화장실 탈출 사건>의 글을 쓰기로 했다.
똥이 마려워 화장실로 다다다다 뛰어갔어요. 문을 열고 뿌지직 똥을 쌌어요. 그런데 휴지가 없어요. 우리는 어떻게 탈출할까요?
휴대포느로 쿺앙에 휴지를 주문헤서 탈출합니다.
오스로 다꼬 찌찌를 가리고 탈출해요.
치쏠로 다꼬 탈출할래요. 똥꼬가 까실까실해요.
팬티로 다끌거에요. 바지로 다끄면 창피하니까요.
휴지도 없는 화장실에 칫솔이 있을 리 없건만, 기상천외한 방법을 짜내는 아이. 받침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여 그저 '쿠팡'을 굳이 어렵게 '쿺앙'이라고 써 놓은 아이. 아이들이 쓴 문장을 함께 읽으며 우리는 '퇴고'를 한다. 이후, 이 기발한 탈출기는 복도에 조선시대 '방'처럼 전시되었다. 저마다 분홍빛 발그레한 얼굴이 되어 독자들을 기다린다. 아이들의 글은 누군가에 닿기 시작한다.
라이킷 소리에 생기가 도는 저희들의 선생님처럼, 자신들의 글에 붙은 스티커를 보면서 아이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그렇게 아이들도 나처럼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괜히 뒷짐을 지고 여기저기 글쓸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는 나처럼 우리는 또 재미있는 소재를 찾아 헤맨다. 이번엔 '초능력'이다. 누가 외계생명체 아니랄까 봐 초능력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써보자는 아이들.
순간이동 초능력으로 박**이 잔소리할 때 도망을 갈 거라는 아이.
제아무리 초능력자라도 나의 이름 뒤에 붙어야 마땅한 '선생님'이 사라져 버린다.
투명인간이 되어 잔소리하는 선생님을 뿅망치로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아이....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들기 어려운 법. 그러나 열망하는 초능력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저마다의 문장 속에 소망과 함께 이유를 담아낼 줄 알게 된 우리 1학년이다.
#1. 쉼 쉴 곳 없이 기이이인 문장
그러나 나는 욕심쟁이 선생님. 한 문장이라도 써내는 아이들에게 만족할 법도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었던 교사는 제 욕심을 아이들에게 투영시키고 있나 보다. 나조차도 못하는 퇴고를 아이들에게 기대하고 있으니.
어제 아빠랑 누나랑
에버랜드에 갔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잠을 잤는데
도착을 했는데
기분이 안 좋았는데....
어진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아이는 가만히 듣는다. 어디가 이상한 것 같아? 그러나 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는 아이. 이번에는 방법을 달리 한다. 숨을 쉬지 않고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읽어준다. 그제서야 아이는 "아~~ 자꾸만 데, 데, 데 해요."라며 씨익 웃는다. 그래~ 어진이 이야기 읽다 보니 선생님은 숨을 언제 쉬어야 할지 모르겠어.
이후로 아이는 자꾸만 묻는다. 선생님, 저 이제 데-데-데... 이렇게 안 쓰지요? 잘했지요?
어진이의 '데, 데, 데' 화법은 거울이 되었다.
아이들은 소리 내어 문장을 읽는다.
간결한 문장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는 아이들.
#2. 어색한 비문들
말은 다들 어른 뺨치게 잘도 하는데 유독 문장을 쓸 때는 비문이 난무하다. 무릇 작가라면 비문은 피해야 하지 않는가. 가영이의 일기에 "나는 학교에서 미술선생님이 오셨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가영이가 소리 내어 읽어볼래? 어딘가 이상한데?라고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제가 쓴 문장을 소리 내어 읽더니 가늘게 아! 감탄사를 곁들이며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무엇이 이상한지 말로 표현은 못해도 어색한 문장을 눈치채는 가영이.
선생님도 글을 쓰면 소리 내어 읽어본단다.
이상한 점을 금세 찾아낼 수 있어.
아이들은 조그만 입을 옹알거린다.
<왜 띄어 써야 돼?>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다. 이 그림책은 1학년 필독서가 아닐까. 띄어쓰기 실수가 실제 상황으로 이어지는 재미있는 해프닝. "아빠 가죽을 드신다."라고 띄어쓰기 실수를 하니 아빠가 갑자기 가죽을 드시고, "엄마는 서울 시어머니 합창단"이라고 또 실수를 했더니 엄마가 갑자기 할머니로 변한다는 이야기.
처음엔 자기가 쓴 문장들을 내 앞에 들이밀기 바빴다. 그러나 나는 아주 냉정한 선생님이다. 스스로 다시 읽어보라고 공책을 미뤄놓는다. 이후로 아이들은 가만가만 소리 내어 문장을 읽다가 스스로 퇴고를 하신다.
아이들이 나를 흉내 낸다.
제 문장에 ∨표시로 띄어쓰기 수정도 하면서.
아이들의 퇴고의 흔적을 보며 사실 나는 나를 되돌아보았다. 고백한다. 가끔 나는 퇴고 없이 글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발행 후 읽어보면 부끄러운 적도 많았다. 아이들의 ∨표시는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때로는 맞춤법이 발목을 잡는다. 몇 번을 읽어봐도 뜻을 알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느 날 <곡차자오는 하괘해>라는 제목의 아이의 일기를 만났다. '하괘해'는 도대체 무엇인가. 곡을 찾아온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의 의도를 모르겠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자 생각하며 다시 문장을 읽다가 드디어 그 외계어를 해독하였다. '곧 찾아오는 학예회'라고 쓰고 싶었던 아이. 웃음이 터져서 내가 웃자 영문도 모르고 아이도 따라 웃는다.
나는 곡하괘해를 마주할 것이다.
그레서 연습을 아주 열씨미 할거시다.
하지만 무대는다 르다.
선생님은 처음엔 '하괘해'가 뭔지 몰랐어. 하지만 서율이 일기는 너무 감동적이야. 아이랑 나랑 하나하나 이야기 나누며 글을 퇴고하였다. 요 영리한 아이에게 퇴고라는 말을 알려주었더니 아이는 신이 났다. 자기는 그림일기 쓰는 게 제일 재밌다고. 요 아이가 바로, 매번 수업 시간에 지겹다는 둥 공부하기 싫다는 둥 초치는 발언을 하던 그 아이였다. 퇴고를 하는 꼬마작가가 되고부터는 공부에 재미를 들이는 모습이었다. 외계어로 오해받았을지라도 아이의 일기에는 자신만의 생각이 가득 묻어났다. 게다가 '학예회를 마주한다'라는 표현은 너무나 시적이지 않은가. 아이의 일기는 너무 근사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어설퍼보이는 짧은 문장으로도 마음을 관통하는 표현을 해내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내가 장착하고 싶은 초능력을 아이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역시 글이란 것은 진솔함과 순수한 시선이 필요하구나. 아이들의 문장이 욕심만 많은 나를 또 깨우쳐준다.
선생님이랑 '감동'이 무슨 뜻인지 이야기 나눈 적 있지?
너희들의 마음이 담긴 글이 선생님 마음을 움직였거든.
너희들이 바로 꼬마작가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는다.
맛있는 음식을 앞두고 짓는 웃음과 다른, 그야말로 잔잔하게 빛나는 미소와 눈빛이었다.
퇴고는 문장을 고치는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미소와 눈빛의 순간에 아이는 문장과 함께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 어려워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처음엔 걸음마도 어렵지.
처음엔 '엄마'라고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아하! 하고 깨닫는 순간이 온단다.
그렇게 스스로 할 줄 아는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기는 게 바로 자라는 거야.
어떤 이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여덟 살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아이들은 어른이 믿어주는 만큼, 스스로 해낼 힘을 품고 있음을 믿고 있기에. 서툴고 어설플지라도 작은 일을 스스로 해냈을 때 반짝이는 그 눈빛과 미소. 나는 그 순간들을 믿는다. 어쩌면 아이들은 바로 그 찰나들 속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이 왜 그리 어렵니
미안하다 말할 줄 아는 용기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용기
그래서 선생님도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미안하다 말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