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도 엄마가 있어요?
"선생님! 큰일 났어요. 은서(가명)가 울어요."
아이고, 아침부터 또 무슨 일인가. 학교에 데려다준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다고 은서가 운다는 이야기다. 은서가? 그 씩씩한 은서가? "그래서 문 앞에서 안 들어오고 울고 있어요." 선생님이 가봐야 한다고 나를 데리러 왔단다. 멀쩡히 학교 잘 다니다가도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면 이런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엄마품이 그리운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지 하면서도 아이를 달래어 들어와야 하는 일.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은 아이들
엄마냄새가 그리운 아이들
그러나 집에 가도
엄마가 기다리지 않아
서러움 북받치는
아이 하나, 외로이...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은서는 내 손이 자기 손인 줄 아는 아이다. 만날만날 내 손을 찾아 헤매는 아이. 자기 말로도 나는 선생님 '꼼딱찌'란다. 내가 화장실을 잠시 가도, 교장실이나 교무실을 잠시 가도 홍길동처럼 어디선가 등장해 내 손을 낚아채며 '나는 선생님 꼼딱찌'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점심시간이면 꽃밭에 물 주러도 같이 가야 하고, 올해처럼 더웠던 여름 낮에도 토마토 보러 가자고 하면 나는 따라나서야 했다. 그야말로 '꼼딱찌'.
그런 은서를 달래어 교실로 왔다. 우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며 말한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를 만나면 되지.. 친구들도 모두 엄마 떨어져서도 잘 있잖아. 그래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강도를 조금 높인다. 너는 맨날 선생님 꼼딱찌라고 해놓고, 선생님은 버리고 엄마만 찾을 거야? 평소 같으면 요 정도 달래주면 또 배시시 웃곤 하는데 통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 울음이 잦아들긴 했지만.
우는 아이를 딱딱한 의자에 앉혀놓기도 마음이 안 좋다. 이번엔 강도가 아니라 방향을 선회해 보자. 아주 조심스럽게 또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어떤 친구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도 엄마를 못 만나는 친구도 있어. 그런데 은서는 매일매일 학교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잖아. 아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우리 반엔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랑 떨어져 지내는 아이가 있다. 아이의 사정은 제 입으로 다 말하여 우리 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연이다. 그럼에도 늘 씩씩했던 그 아이. 은채는 그 아이를 힐끗 본다.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보다 더 슬픈 사연으로 내 마음을 위로받는 것, 그건 사실 잔인한 일이 아닌가.
아이를 달래주려고 더 아픈 사연을 들이대는 부족한 선생님이었다, 그날의 나는.
은서를 보며 문득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에 엄마 등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쉬게 해 주려고 젊은 아빠가 나를 업고 달밤에 산책을 나갔다. 엄마 등을 원했지 아빠 등을 원하지 않았던 나, 악을 바락바락 쓰며 울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유괴범이라는 오해를 받았더랬다.
집요하게 엄마만 찾는 아주 까칠한 아이. 조금 더 자라서도 나는 똑같다. 방학이면 사촌 언니, 오빠들 모두 함께 포항 할머니집으로 갔다. 방학 내내 할머니집에서 산이고 들이고 개울이고 하물며 동네 상여집까지 헤매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노을이 질 무렵이면 나는 병이 도진다. 할머니집 대문 앞에 쪼그려 앉으면 저 멀리 포항제철 불빛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인다. 엄마 보고 싶은 생각에 슬픈지, 포항제철의 불빛들이 슬픈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집 떠나 낯선 풍경 어디선가, 난 갑자기 엄마 생각에 가슴이 시린 적도 많았다.
그런 나이기에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은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받아쓰기 공책의 끄트머리에..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나는 가슴이 콱 막혔다. 어릴 적 노을이 질 무렵,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음을 너무 잘 알기에. 이 여덟 살 아이의 엄마는 그런 기약도 없이 떠났다. 이 막막한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엄마 얘기하는 걸 아빠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이 아이. 보고 싶다고 울지도 못하는 이 아이에게 정말 나는 해줄 것이 없었다. 그저 아이를 꼬옥 안아주는 수밖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인아. 나중에 선생님이 되어 엄마를 찾아가면 어때? 말해보지만 너무나 기약 없는 시간들. 나의 말이 무책임한 희망고문이 되지 않을까. 내 안에서 마음이 소용돌이친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일까.
유난히도 작고 여린 팔을 가진 그 아이. 늘 계절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의 옷. 때론 너무 더웠고 때론 너무 추웠다. 물놀이 체험학습을 가는 날, 예쁜 캐릭터가 그려진 방수 보조가방을 어깨에 X자로 둘러맨 친구들. 검정색 비닐봉지를 들고 온 이 아이의 어색한 미소. 마음 한켠이 서늘해진다. 분홍색 롱패딩 점퍼, 털 달린 부츠와 장갑. 친구들 몰래 학교에서 주는 분홍빛 선물에 아이는 가끔 환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추석 무렵이었다. 가을은 누군가를 더 절실하게 그리워하게 만드는 빛깔을 가진 계절. 아이와 나는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이 조심스러운 아이가 조용히 묻는다. 선생님도 엄마가 있어요?라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린 질문을 마주한 나. 다 큰 어른인 선생님도 엄마가 있는데 말이다. 원망이 스며있는 듯한 아이이 한 마디.
사람은 누구나 엄마가 있지, 엄마 없이 세상에 태어날 수는 없으니까. 가을이도 친구랑 싸우면 잠시 같이 안 놀고 싶지? 어른들도 그럴 때가 있단다. 가을이 엄마 아빠도 지금은 잠깐 서로 안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가을이 엄마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가을이도 가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있단다.
돌이켜보면 그 말들은 위로가 아니라, 내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아이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선생님은 '학교 엄마'라고 말하곤 했지만 아이들의 진짜 엄마의 자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안다. 외로운 아이들에게 나는 해줄 것이 없는 무력한 선생님이다. 그저 학교에서라도 외롭지 않기를.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여덟 살이니, 학교에서라도 더 안아주는 수밖에. 그리고 외로움을 마음속 깊이 넣고 덮어두지 않도록 아이와 속닥속닥 비밀 이야기나 주고받아주는 수밖에. 학부모들이 모두 오는 학예회날이면 외로운 아이를 끼고돌며 엄마인척 해주는 수밖에..
그러나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나는 함께 해주지 못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늘이 어둑어둑 노을질 무렵,
엄마가 그리울 시간에
소나기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기다리는
친구의 엄마를 바라보는 순간에
받아쓰기 백점을 맞은 날,
엉덩이 토닥토닥 칭찬해 줄 엄마가
필요한 순간에
친구랑 싸워서 억울한 날,
무조건 내 편 들어줄 엄마가
달려와 줄 순간에
그 모든 계절에, 그 모든 순간에
엄마품이 그리운 순간에
그날의 아이들 눈빛이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았다.
아기공룡 둘리도 짓궂은 희동이 때문에 엄마와 헤어지게 되었다. 서로 함께 머물고 싶었던 둘리와 애타게 둘리를 찾는 엄마공룡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이 떠오른다.
어쩌면 엄마가 보고픈 이 아이들은 정말로 지구에 불시착한 작은 외계 생명체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행성의 기억, 따뜻했던 모선(母船)의 온도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있다. 나는 그저 이 낯설고 외로운 '지구별'에서, 그들이 조금이나마 덜 춥고 덜 무서운 시간을 보내도록 돕는 일시적인 보호자일 뿐이다.
노을이 질 무렵, 엄마가 그리울 시간에. 친구의 엄마를 바라보는 순간에. 칭찬해 줄 엄마가 필요한 순간에.
나는 그들의 안전 기지가 되어 그들의 외로움을 잠시 보류해 줄 수밖에.
아이들이 지구별 적응을 마치고 언젠가 환하게 빛나기를 나직이 소망해 주는 수밖에.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나의 여덟 살 아이
너에게 내가 해줄 것이 없어서
우리 둘이 꼬옥 안고 울기만 했다
여덟 살 설움이 나를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