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님은..."으로 시작된 아이들의 반격!
여름방학을 보내고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상상이 될 만큼 얼굴마다 여름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찐한 포옹을 하며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선생님 안 보고 싶었어? 물으니 수줍게 대답한다. 선생님은 오늘 뭐 할까 생각했다고. 어느 순간 한 번은 생각하셨나 보다. 사회성도 자라는지 그래도 보고 싶었다는 대답을 해주네. 그저 그 맥락의 대답에 만족하는 나.
한 아이에게도 똑같이 물으니 슬쩍 나를 보더니 도망을 간다. 씨익 조커같이 웃으며 대답을 먹어버린다. 그렇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새로운 날을 또 시작하였다. 그러나 2학기엔 아이들이 다른 양상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이 어린이는…" 이란 말은
아이들을 얼음으로 만들고,
"이 선생님은…" 이란 말은
나를 녹여버렸다.”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그동안 까먹었구나, 통지표의 무서움을.
그리하여 나는 또 "이 어린이는... "이라는 말의 매직을 풀어놓던 어느 날이다.
급식실 정리를 해야 하는 시간. 아이는 밥풀떼기로 장난을 치고 밥을 먹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니 한 입 입에 넣고 씹지도 않는다. 나는 마음이 급하다. "이 어린이는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장난을 치고.. "라고 시작하는 나의 통지표 협박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반격을 시작했다. 아주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이 선생님은 맨날 잔소리를 하는 선생님입니다."라고 되받아치는 게 아닌가.
순간, 웃음보다 당황이 먼저 왔다.
하지만 아이의 반격은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우리는 함께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다른 아이들, 아주 신이 나셨다. 이후 나의 통지표 협박은 매번 이런 식으로 되돌아와 물거품이 되었다.
"이 어린이는... "이란 말은
아이들을 얼음으로 만들고,
"이 선생님은..."이란 말은 나를 녹여버렸다.
통지표의 효력은 끝이 나고 말았다.
꼬마작가가 자라고 있는 우리 교실. 주제를 가지고 그림일기를 쓰곤 했는데 갑자기 한 아이가 놀랄만한 제안을 한다. 선생님도 통지표 받으면 안 되냐면서. 그래, 좋다! 오늘의 주제는 선생님의 통지표다.
아이들의 문장은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때로는 내 마음을 콕 찔렀다.
나는 선생님한테 당한 게 많다
나에게 잔소리 폭격을 받던 한 아이의 그림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선생님한테 당한 게 많다. 왜냐고? 맨날 잔소리를 한다... 중략... 은채한테 맨날 배신자라고 놀린다. 그래서 은채가 폭주한다. 우리 선생님을 절대 뽑지 마세요.
아,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인가. 아이는 나의 사장님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선생님을 절대 뽑지 말라고. 그러나 이 아이의 표현이 딱히 잘못되었다고 말도 못 하겠다.
아이의 통지표는 정직했다.
이 선생님은 사장님을 놀릴 거 같습니다.
그림에 유독 자신이 없던 한 아이. 다리 두 개 달린 이상한 원 두 개를 그려놓고 치타라고 말한다. 나는 아이의 그림에 귀도 그려주고, 다리도 두 개 더 그려주면서 "하늘이 치타 진~짜 못생겼다!"라고 장난을 친다. 하지만 유난히 선생님의 칭찬을 먹고사는 이 아이, 나는 슬쩍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에 눈만 보인다. 빨개진 아이의 눈과 이마. 눈물을 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장난을 쳐놓고 또 수습에 들어간다. 미안하다 말하며 안아주지만 그 순간 설움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이 선생님은 치타가 못생겼다고 놀렸습니다. 선생님은 잘 혼내지만 우리에게 한글을 가르쳐줘요. 우리를 웃게 장난을 칩니다. 이 선생님은 사장을 놀릴 거 같습니다. 우낄거 같습니다. 그래서 뽑아주세요.
그 아이는 그래도 선생님의 숨은 이면을 들여다보는 훌륭한 아이가 아닌가. 하지만 우리 반 모두가 신뢰하는 모범생 이 아이를 놀려서 울게 한 죄.
나는 이후로도 아이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다.
한글공부를 할 때 아이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 선생님은 힌트를 안 줄 거야, 스스로 찾아봐~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직 길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슬쩍슬쩍 힌트를 주곤 했었다.
"이 선생님은 시험 볼 때 힌트를 안 준다고 해놓고 꼭 준다. 이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공부를 가르쳐줘서 공부를 잘하게 됐다. 나 같으면 선생님을 뽑을 거다."
근데 그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선생님은 거짓말쟁이라고까지 냉정한 평가를 하는가. 하지만 아이의 마무리가 훈훈하여 마음이 위로가 된다. 대의를 중시하여 나를 뽑겠다는 것 아닌가.
대인배의 싹이 보이는 아이의 평어가 고마웠다.
이 선생님은 우리 마음을 다 아니까
아침마다 오늘의 기분을 이야기하며 수업을 열곤 한다.
"저는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요."라고 말하는 한 여자 아이. 냄비근성이 있는 나는 쉽게 화도 내지만 또 쉽게 감동을 받는다. 이 아이의 발표 후에 나의 목소리는 아주 사근사근 부드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감동시켰던 이 따뜻한 아이는 나에게 또 이런 봄바람 같은 통지표를 안겨주었다.
"이 선생님은 우리 마음을 다 아니까 뽑아주세요.....(중략).... 하지만 거짓말도 해요. 사장님한테도 거짓말을 할 것 같아요."
아이들의 말은 때론 통찰이고, 때론 장난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가볍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아이들을 키우기보다 데리고 장난치는데 더 적합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동글동글 알찬 밤톨 같은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 꼭 손가락으로 톡~. 아이는 화도 못 낸다. 이이잉~ 알 수 없는 귀여운 소리만 낼뿐.
한 아이는 말한다. "선생님은 장난을 많이 친다. 왜냐하면 우리랑 놀고 싶으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나의 진심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장난의 수준과 빈도를 어느 정도로 맞춰갈지 고민해 볼 일이다.
자기보곤 골고루 먹으래 놓고, "이 선생님은 밥을 남기는 선생님"이라는 아이,
우리보고는 뉴스에 나오는 사람처럼 바르게 앉으래놓고, "이 선생님은 다리를 꼬고 앉는다"는 아이,
우리도 먹어보고 싶은데 "아침마다 자기만 커피를 마시는 선생님"이라는 아이,
자기 통지표를 잘 써줘서 직업을 잘 찾을 것 같다는 놀라운 아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가르치며, 함께 자라고 있는 동무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여덟 살 아이들에게 통지표를 받은 첫 번째 선생님이 아닐까?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써주는 통지표. 삐뚤빼뚤, 맞춤법도 엉성한 아이의 문장들. 그 안에 아이들의 진심이 숨어있다. 선생님의 장난을, 선생님의 잔소리를 고발하면서도 그래도 이 선생님을 뽑아주라고 하는 아이의 글. 그 속에 나의 장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주는 고마운 마음이 스며있다.
물론 끝까지 당한 게 많아서 나를 뽑지 말라는 아이도 있긴 했지만. 뿔테 안경을 끼고 나를 슬그머니 째려보며 조커 같은 미소를 짓는 그 개구쟁이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진 않았다.
통지표의 효력도 떨어지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통지표로 평가를 받게 된 나. 하지만 이러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더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변신괴물의 큰 목소리와 무서운 표정, 통지표의 협박보다 더 강한 것. 같이 놀아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귀여운 반란을 이해해 주는 것.
결국, 아이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건 힘보다 마음이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스며드는 것,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아이들의 정직한 통지표로 나를 다시 배우는 중이다.
엄마가 곁에 있어도
엄마가 보고 싶다.
늙어가는 나도 엄마가 그립다.
학교 끝나고 집에서
맛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나를 기다리는 엄마.
그런데 말이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도
엄마가 없는 아이들.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