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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철학자 이야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by 봄비


공부를 시작하려고 종합장을 꺼내라고 한 순간, "아, 종합장... 지겨워."라고 말하는 한 아이. 나도 순간 수업할 맛이 나지 않는다. 한마디 말에 담긴 마음은 공기로 전염된다. 이러한 한 마디가 여름철 잡초처럼 번지는 건 한 순간. 이 말이 민들레 홀씨처럼 우리 교실을 유영하며 돌아다니기 전, 나는 급히 불을 끄듯 진압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이 모두에게 전파되면 우리 반은 우야노...

너희들이 반짝여야 선생님도 힘이 나
너희들이 웃어야 선생님도 행복해
너희들이 공부해야 선생님도 월급 쫌 받지!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배운다는 건 항상 조금 어려운 거야.


색종이를 반듯하게 오리는 것도 여덟 살에게는 큰 공부. 그러나 아이들은 어렵다는 말을 쉽게 한다. 1학년들이 학교에서 걸음마를 배우면 얼마나 시시하겠니? 지금은 어렵지만 노력해 보는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아하! 이거구나! 그렇게 자라는 거야.


<ㅎ>+<ㄷ>=<ㅌ>이 무슨 뜻일까?

참으로 오묘한 <ㅎ> 받침의 비밀. 나는 어려운 발문을 던진다. 가는 길이 힘들 때 조금씩 힌트도 주면서. <좋다>라고 써놓고 <조타>라고 반복하여 읽어주며 아이들이 길을 찾아내길 기다려본다.

아이들이 뭔가 눈치를 채기 시작한다. <ㅎ>이랑 <ㄷ>이 만나면 <ㅌ> 소리가 난다!!!
어려운 것 같지만 여덟 살 아이들도 비밀을 풀어낸다.
눈을 똥그랗게 크게 뜨고, 아이들만의 순수 언어로 설명하느라 난리가 난다.

우리 반 탐구수업의 모양새가 대체로 이렇다. 수업이 끝나며 한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초롱초롱 반짝이며 선생님 너무 재밌고 신기해요라고 말한다. 나는 힘이 난다. 보람을 느낀다. 더 재밌고 좋은 수업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모두가 내 마음을 알아줄 수는 없는 일.

사실 아이한테 좀 미안한 표현이지만 유독 한 아이가 자꾸만 초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지겨워, 하기 싫어, 또 공부해 등등의 시리즈 언어로 말이다. 아이의 감정이 다른 아이들에게 옮겨가기 전에, 나는 재빨리 수습에 들어간다.


그 유명한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달콤한 마시멜로 2개를 얻기 위해 15분의 유혹을 참아낼 수 있겠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으이그, 이 거짓말쟁이들!! 나는 또 여덟 살을 상대로 열변을 토한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Q. 선생님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었을까?

아니야. 선생님도 늦잠 자고 싶었어. 실감 나는 연기를 곁들여 주어야 한다. 늦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나는 교실에 있는 매트에 뒹구는 연기도 해낸다. 내 나이 오십에.

Q. 선생님은 학교에 오고 싶었을까 아니면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을까?

대부분 아이들은 선생님도 놀이공원에 가고 싶었을 거라고 대답한다. 나도 그 대답을 기대하며 발문 하였다. 가끔 모범적인 어린이, 선생님에 대한 무한신뢰를 가지고 있는 어린이가 기대하지 않은 답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학교에 오고 싶었을 거라고. 이그, 눈치 없기는.

Q. 선생님도 그렇지만 우리 모두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너희들은 지금 뭘 하고 싶니?

질문을 던지는 순간 각자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느라 또 교실은 난리법석이 된다.
아이들의 답은 제각각이지만 공통분모는 하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는 아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너희들이 매일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아?

1학년 아이들과 나누기에 어려운 대화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보다 우리 여덟 살 아이들은 철학적이라는 점.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면 펄펄 뛰던 아이들도 조용히 숨을 죽인다. 그리고 생각에 빠지는 눈동자를 만든다. 나직하게 한숨을 쉬어가며 진지하게 듣는다.


그런 고요함 뒤엔 언제나 깨달음이 온다.


그리고 나면 비록 외계언어일지라도 각자가 느낀 바를 쏟아내느라 다시 분주해지는 교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결국은 이해하는 아이들이란 말씀.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조금 부끄러운 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 철학적 논제에 살짝 경쟁의 논리를 가미하여 아이들을 자극시키곤 한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 있는 1학년 학생들 모두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희들만 놀면 어떻게 되겠냐면서. 너희들만 매일매일 하고 싶은 일만 하면 나중에 한글도 못 읽는 바보똥꼬 어른이 될 것이라는 무서운 협박과 함께.


이후 우리 아이들은 공부시간에 공부하기 싫다는 말도, 한숨도, 어떤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그런 의젓한 여덟 살이 되었다. 단, 이 여덟 살 철학자들은 사실 조금 비겁한 구석이 있다. 공부만 시작하면 하기 싫다고 징징대던 그 녀석들이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공부할 준비를 하며 "난 공부가 재밌어."라는 말을 능청맞게 하는데, 나는 그 비겁하나 귀여운 태세전환에 웃을 수밖에.





우리 몸속에 '병균과 싸워 이길 군인아저씨'를 키우려면 먹기 싫은 음식도 먹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만날 만날 세뇌를 시키던 중이었다.


어느 날, 급식 시간. 평소 나물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던 한 아이가 나물을 숟가락 위에 얹어 놓고 "도전!"이라고 외치며 이렇게 말한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 안 되잖아요. 먹고 싶은 것만 먹어도 안되니까요. 나물 먹는 것도 도전해 볼라고요. 제가 먹는 거 사진 찍어주세요!"


그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인생이 어디 있겠니. 먹고 싶은 것만 먹고사는 인생도 어디 있으며. 여덟 살 너희들도 이제 인생이 시작되었구나. 어찌 보면 고달플 인생이 시작되었구나.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인생, 해야 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절로 생긴다는 것을 너희들도 알게 되었으면.


못다 한 이야기


선생님은 어릴 적에 먹기 싫은 반찬, 엄마가 꼭 먹으라고 하는 반찬을 먼저 먹었어. 그러고 나면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들만 남아 있잖아. 그 행복함..

선생님은 어릴 적에 하기 싫은 숙제를 먼저 후딱 해치웠어. 그리고 나서 저녁 늦게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놀아도 엄마한테 당당하잖아. 숙제를 하고 난 뒤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생님은 고무줄 위를 날아다녔어!

아이들에게 하리보젤리를 주었다. 얘들아, 청소 먼저 하고 먹을래 아니면 먼저 먹고 청소할래? 나는 사실 먼저 먹고 청소를 하고 싶었다. 작은 손들이 놓친 그 비닐들이 쓰레기가 될 테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대답한다. 청소 먼저 하고 먹을래요. 하기 싫은 거 먼저 하고 젤리를 먹으면 더 맛있어요!

급식을 먹을 때도 달라진 모습. 선생님, 저 버섯 먼저 먹을 거예요. 그러고 나면 맛있는 돈가스가 기다리잖아요!

어른들도 어려운 일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나날이 저울질을 하며 살고 있지 않나.

여덟 살 아이들에게도 삶을 계획하고 정돈하며 사는 씨앗을 마음밭에 뿌려주고 싶었다.

해야 하는 일들을 마치면 하고 싶은 일들이 내 앞에 펼쳐져 내 시간들이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거라는 사실.. 그 삶의 지혜를 장착한 아이가 되길 바라며.




# 이어질 8화 이야기, <이 어린이는! 이 선생님은! >

고달픈 인생은 이미 시작되었다!


너희들 생활통지표가 뭔지 아니?

거기에 선생님이 무언가를 적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니?

미안하다 얘들아,

선생님의 능력은 여기까진가 보다.

통지표로 협박을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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