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이 놀기만 한다고? 교과서가 무려 18권이다. 어쨌든 많고 많은 배움 중에 1학년 배움의 최고봉은 한글 아닌가. 라떼는 말이지.. 나는 어릴 적에 한글을 어떻게 떼었던가? 한글 자모음표 붙여놓은 방에서 엄마한테 꿀밤 맞아가며 글자를 외우곤 했었지. 세종대왕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한글 외우기 전법!'. 우리는 그 시절 그렇게 공부를 했었다.
그 글자 못써요 말하는 시간에
그 글자 발음을 해보렴
세종대왕님이 너희들을 위해 준비해두신 밥상,
발음만 해보면 다 네 것이 될테니
「외계생명체, 그들은 1학년」 by 봄비
한해 한해 내가 만난 아이들의 출발점을 진단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과제. 몸이 아픈 아이, 마음이 불안한 아이, 아이를 둘러싼 환경, 그리고 아이의 초기 문해력.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 수준의 읽기와 쓰기 수준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여러가지 낱말들을 써보라고 했더니만.... 세종대왕 뺨치는 아이들!! 자음의 좌우가 바뀌기도 한다. 모음이 자음보다 먼저 자리잡기도 한다. 나는 세상에 'ㄹㄹ'(쌍자음)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무언가 어렴풋이 아는 아이는 아무 받침이나 두 개를 밀어 넣는다.
니가 세종대왕이냐?
아이들의 글자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외계어를 쓰는 너희들!
너희들의 외계어가 지구어로 변해가는 모습!
우리 함께 만들어보자~
2017년, 초등학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학년에게도 교육과정 속에서 한글을 배우자는 취지의 훈풍이 불어왔다. 그러나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현실은 어렵기 마련이다. 낫놓고 기역도 모르는 아이, 동화책이든 간판이든 안내장이든 줄줄줄 읽어내는 아이. 여기에 맞추면 저기가 힘들고, 저기에 맞추면 여기가 지루하고!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함께 데려갈까 고민을 하였다.
어느 봄날, 출근길에 우연히 간판을 봤다. 맨날 지나치던 <한우소머리곰탕> 식당의 간판. 한. 우. 소. 머. 리. 곰. 탕. 조용히 소리를 내어 발음해 본다. 아! 발음이구나. 발음의 원리를 탐구해보자! 그동안의 한글지도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탐정처럼 아이들과 한글의 비밀을 파헤쳐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탐정이 되어 비밀을 찾아내야 했다. 그 때 나도 처음으로 '배움'을 배운 것 같았다.
평화로운 1학년 교실, 우리는 다같이 소리내어 읽는다. 마치 개구리들의 합창처럼 울리는 아이들의 쟁쟁한 목소리들. 이렇게 소리내어 발음을 하다보면 한글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한다. 뭐가 달라졌니? 나는 묻는다.
가, 나, 다, 라..... 가-알, 나-알, 다-알, 라-알.... <ㄹ>받침이 들어가니 무엇이 달라졌니?
"혀가 위로 꼬부라져요." 세종대왕이 마련한 밥상을 아이들은 덥썩 받아 안는다. 그렇게 또 아이들은 여덟 살 인생에 써보지 않았던 <달걀>, <룰루랄라>, <비탈길> 같은 낱말들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선생님, <별>, <달>, <하늘>에도 ㄹ받침이 있어요!" 저마다 찾은 <ㄹ>받침 낱말들을 외쳐대는 난리 부르스의 교실. 이렇게 아이들은 또 자란다.
가-ㅁ. 나-ㅁ, 다-ㅁ...... <ㅁ>받침은 어때?
아이들의 입술이 동시에 오므려졌다. "어머, 할배들 같아!" 나는 부러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그 순간 아이들은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는다. 빠진 이를 감추려고 입을 다문 할배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이들은 또 <ㅁ>받침의 특징을 기억해주겠지. "선생님, <임금님>, <캄캄하다>, <구름>, <잠자리> 다 ㅁ받침이 있어요."
그런데 어쩌지? <ㅂ>받침이랑 <ㅁ>받침은 둘 다 입이 다물어지는데, 어떻게 구별할까?
아이들이랑 발음을 하며 숨참기 시합을 한다. 가을의 선물 <밤>과 매일매일의 선물 <밥>이라는 낱말로.
숨참기 시합을 하면서 아이들을 또 하나를 배우게 된다. <랍스터>, <컵밥>처럼 처음 써보는 낱말도 각자의 한글 사전 속으로 쏘옥~ 집어 넣는다.
아이들의 삶과 관련된 낱말들을 찾는다. 그 중에서 오늘의 배움과 관련된 낱말 목록을 미리 만들어 둔다. 아이들은 한글 공부를 하면서 그 낱말과 관련된 경험들을 떠들어댄다. 우리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즐거운 탐정 놀이 시간인 것도 같다.
<ㅁ>과 <ㅂ>받침 공부를 하는 날은 <삼겹살>
<ㄱ>과 <ㅂ>받침 비교를 하는 날은 <급식>
각자 입을 오물거린다. 어떤 아이는 굳이 손을 입 안에 넣어 혀가 어디 있는지, 다물어진 입술을 굳이 손집게로 잡아보기도 하고, 목젖을 한번 두들겨가며 숨이 막히는지도 확인해 본다. 그렇게 하여 결국 선생님이 불러주는 낱말을 스스로 찾아서 쓴다.
아이들의 입이 작은 악기처럼 울린다.
혀끝에서 자음과 모음이 춤을 춘다.
아이고... 어른들도 헷갈리는 어려운 받침들. 나도 가끔은 '어, 받침이 뭐더라?' 헷갈릴 때가 있다. 아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도전의 용기를 붇돋워준다. 선생님도 가끔은 말이야, 받침이 너무 헷갈려....
얘들아, 받침이 어려울 때는 발음을 해보는거야.
아이들과 낱자 카드로 놀이를 한다. 글자를 읽을 때 <ㅇ>이 도망가는 장면을 실제로 조작해보며.
<높다>, <닫다>, <얇다>, <맑다>, <앉다>, <많다>
이 받침들을 어떻게 다 외운단 말인가!
선생님! <ㅇ>이 받침한테 자리를 양보해줘요. 한 아이가 내뱉은 깊은 철학적 사유. 수업 중 툭툭 내뱉는 아이들의 참신한 표현들은 때로는 백마디 선생님의 설명보다 효과적이다. 이 아이의 참신한 발견 이후 받침 공부를 할 때마다 나는 <양보하는 ㅇ>이라는 표현으로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아이의 말은 아이들에게 쉽게 통하였고, 나도 이 아이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그 낫놓고 기역 모르는 그 아이, "짱구"(가명). 짱구의 눈부신 성장을 자랑하고 싶다.
자음, 모음 소릿값과 모양을 겨우겨우 알아가던 3월, 짱구의 마음은 괴로웠다. 자신만 몰라서 위축되는 마음. 더딘 자신의 속도를 기다리는 친구들 때문에 쫓기는 듯 불안한 마음. 마음이 서글퍼지는 짱구는 때론 눈물도 흘렸다.
2학기가 된다. 이제 우리는 문장을 배운다. 간단한 문장들을 이어 글을 써야하는 그림일기 공부시간.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학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기본 글자들을 배우고 왔던 친구들의 실력을 짱구가 뛰어넘어버린다. 짱구의 일취월장. 그 이유는 발음이었다. 발음으로 찾아보라는 선생님의 조언에도 자꾸만 머릿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글자들을 떠올리는 친구들. 기억해내지 못하면 그 글자는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하지만 짱구는 머릿 속에 저장된 글자가 없으니 오로지 발음에 의지하여 글자를 읽고 쓴다. 짱구가 오히려 큰소리 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야, 집중하면 된다고! 발음을 해봐! 입술이 다물어지잖아!" 아이쿠, 개구리 올챙이적 모르고 까부는 짱구.
짱구는 늘 제일 먼저 그림일기를 완성하고, 이제 짱구가 다른 친구들이 일기를 다 쓰도록 기다려준다. 자기의 변화에 스스로도 자뻑! 자기는 그림일기가 너무 좋다며 친구들 기다리는 동안 그림일기를 한 개 더 쓴다.
그 봄, 짱구는 외계어를 지구어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이 세종대왕이라고.
아이들은 그렇게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ㅇ>이라는 배움의 선물을 받았다.
한글을 잘 알던 아이들은 비밀의 열쇠를 찾아 더 깊이 배우게 되었고
한글을 모르던 아이들은 비밀의 열쇠를 통해 지름길을 찾게 되었고
각자의 걸음도 속도가 다르듯이 아이들마다 배움의 속도가 다르다.
조금 더디면 어떤가.
그 봄날의 교실엔 세종대왕의 후예, 여덟 살 탐정들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공부하기 싫다는 아이
그림그리기 싫다는 아이
종이접기 안하겠다는 아이
어떻게 함께 데려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