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늦었다. 분명 튤립이 많다고 들었는데, 만개를 지나 이제 봉오리가 벌어지고 꽃잎을 떨구기 직전이었다. 손을 뻗어보니 꽃잎이 그냥 손바닥에 툭 떨어진다. 아내와 단둘이 걷고 있던 터라 필터를 거치지 않고 아쉬움이 터져 나왔다. '되바라졌어!'
꽃에게 막말을 일삼은 것이 아닌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나름 맞는 용례였다. 이파리가 벌어져 쉽사리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를 형용하는 말이니까. 1. 위가 벌어져 쉽사리 바닥이 드러나 보이다. 2. 튀어져 나오고 벌어져서 아늑한 맛이 없다.
그래도 못내 미안했던 것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되바라지다'의 용례는 바로 이것이기 때문. 3. 사람됨이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지 아니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다.
벌어진 꽃잎의 모습으로 사람을 묘사하니 좋은 뜻이 따를 리가. 예로부터 다들 벌어진 꽃잎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나 보다. 덕분에 즐겨 찾는 인파도 없이 한산한 수목원을 거닐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내의 진로, 그리고 그로 인한 육아의 방향 전환이 주된 소재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 부부의 삶은 지금 이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꽃은 벌어지고 지기 직전, 식물은 이제 꽃보다는 열매로 양분을 집중시키고 있을 것이다. 난 지금 이 순간이 분명 내가 꽃이었던 순간보다 아름답다고 느낀다. 잎 하나쯤 떨어져도, 경계가 풀어져 속이 대충 들여다보여도 부끄럽지도 않다. 화려함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4번으로 뜻을 하나 더 얹고 싶다. 4. 모양에 개의치 않고 과실에 집중하다.
이제 충매화의 시즌이 끝나고 풍매화의 시간인 것 같다. 꽃가루가 바람에 무수히 흩날린다. 코가 간질거려 마스크를 슥 올리면서도 궁금하다. 무심한 우연을 타고 흩날려 어디로 흘러가 어떤 연을 맺을지. 너희도, 우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