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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Apr 24. 2023

사랑은 삼각형

문지혁의 <중급 한국어>를 읽고 4


사랑이 무얼까. 동서고금의 모든 문학이 도전하는 궁극의 물음이 <중급 한국어>에도 등장한다. 지혁은 글쓰기 강의에 안톤 체홉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텍스트로 제시하며 젊은 여성부터 초로의 남성들까지 두루 찾아다니며 화두를 던진다.

사랑이란 이름의 순수한 개념을 건져내려고 고운 체로 계속 거르다보면 무엇이 남을까. 학문적으로 사랑이란 개념을 정의해보려 하면? 그런 고민을 먼저 해보고 정수만을 뽑아 가르치려던 지혁은 강의 중엔 침묵과 직면하지만, 학생들의 대답은 정작 강의가 끝나고 밀려온다. 대답이라기보다 강고한 벽에 가깝다. 그렇게 열심히 걸러낸 작은 입자도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빈틈없는 얼굴들. 그 얼굴들이 양 극단에서 지혁을 향해 밀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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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구로프를 싫어했다. 소설 자체가 역겨웠다고 말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구로프가 추잡하고 위선적인 쓰레기이며, 소설은 불륜을 미화하고 있어 불쾌하다고 말했다.
(중략) 물론 2021년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소설이 적어도 안나에게만큼은 불공평하게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마다 나는 1899년이라는 '시대 보정'이 필요하며, 이제 여러분이 안나의 이야기를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학기 강의 평가를 열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런 문장이었다.
-여혐 가득한 빻은 텍스트를 골라 놓고서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수업
<중급 한국어> 94p. 4장 사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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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다. 불륜=개극혐, 어디선가 본 등식이다. 최근 본 '트롤리'라는 드라마다. 사랑과 불륜과 성폭력이 꽈배기나 실타래처럼 얽힌 드라마 속에서 고등학생 딸의 반응이 딱 이거였다. 맥락과 방향은 제거한 채 현장 스틸컷만 딱 찍어 들이밀고 형량을 내리는 판관.

뿐만이랴, 시대보정없이 여혐딱지를 붙이는 것도 같은 불편함을 자아낸다. 자신이 읽는 행위가 하나의 해석임을 모른 채, 아니 외면한 채 천년 전 경전의 무오류만 반복 주장하거나 아예 비과학적이라는 식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빻은'이란 단어는 심지어 한참 찾아봐야했다. 남성들의 여성외모품평에서 등장한 '얼굴 빻았다'는 조롱을 여성들이 줏어들어 남성들에게 돌려준 표현이더라. 여혐이 깃든 모든 것을 형용하는 만능 조미료에 가깝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가득 담아 읽어야 한다. '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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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구로프가 아닙니까?"
아주 잠깐 동안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뭐든 읽어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남자의 눈동자는 검었고 흔들림이 없었다. 해독 불가의 단단한 어둠.
나는 아까 무대에 오르기 전 경험했던 아득함을 다시 느꼈다.
"나는 내가 구로프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의 다문 입은 그것이 자신의 최종 판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중급 한국어> 98p. 4장 사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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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 벽은 최고경영자 과정에 참석한 중년 남성이다. 우리는 모두 뫼르소이다처럼 우리는 모두 구로프라는 식. 왜 구로프가 쓰레기냐며, 우리 내면에 한조각 구로프 같은 일탈(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결국 불륜)의 욕망이 있지 않느냐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구로프가 뒤늦게 사랑을 찾아가는 어려운 길을 가려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 것이라면 좀 낫긴 할텐데.


마주 본 두 입장 사이에 점점 틈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 사이 회색지대에 서고 싶겠지만 좁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우물쭈물하면 안된다. 빻인다.

궁금해서 결국 체홉의 단편까지 읽어보았다. 변명하자면, 불륜은 맞다. 하지만 둘은 결혼의 밖에서 비로소 격렬한 감정의 실체를 처음 지각했으며, 그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막 시작하려 하고 있고 그 불안한 미래를 둘이 고통 속에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제도와 관습에 머무르는 것이 좋을까. 도덕의 틀 밖으로 튀어나오는 인간을 두들겨 도로 집어 넣는 것이 맞을까. 관계의 변화를 소위 동태적으로 보려해야 드러나는 사랑 이야기인 셈이다.

문지혁 작가는 조금 더 쉬운 설명을 해준다. 사랑은 삼각형. 나노미터의 남편과 킬로미터의 아내,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생명 딸. 세 꼭지점으로 구성된.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사랑은 세모다.


작가가 딸에게 건넨 짓궃은 질문을 오마주해보았다. 아들에게. "엄마랑 아빠랑 결혼할 때 왜 혁이는 안 왔어?" "어.... 그 땐 내가 없었잖아." 이 다큐같은 녀석도 나와 아내 사이에, 하지만 저 멀리 멀찍이 위치한 꼭지점이다.


https://www.youtube.com/live/yHJVHAAXIs0?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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