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에게 그 말을 듣자 마자 화부터 냈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투에서 이미 그 다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절호의 기회다! 당장 이 중매를 잡아라!' 종류의 다급함이었다.
그 다급함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던 나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안 해! 특히 엄마랑 아빠가 나서서 해주는 중매는 절대 안 해!"
나는 툴툴대며 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단지 남자 소개받으라는 것 뿐인데...이렇게 화낼일인가.
내 자신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이 어쩔수 없이 짜증나는 기분은 나를 계속 맴돌았다.
뒤이어 내 방문 뒤로 들리는 나지막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오다가다 이상한 놈 만나느니 어른들이 소개시켜주는 사람 만나는게 훨씬 나아!"
-"하아....."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 사생활을 엄마아빠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 성격의 딸이 아니었다. 그냥 쑥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이다. 그렇다고 부모님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닌데. 암튼 이런 종류의 대화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러서 인지 괜히 '나는솔로' 같은 프로그램도 함께 보질 못한다. 나이 많은 미혼 남녀들이 나와서 결혼이야기 하는 프로그램만 나와도 괜히 불편해져 '에헴'하고 모른척 내 방으로 피신을 가버리곤 한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내 짜증나는 기분을 겨우겨우 달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기분이 나아지고 진정이 될 무렵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전화번호만 알려줄께. 그냥 만나봐"
나는 대답했다.
"그럼 알려줘. 만나볼께. 대신 결말은 물어보지마. 내가 알아서할께"
속전속결
-"알겠어. 그럼 미용실 사장님한테 전화번호 받는다?"
"알았어!"
아무래도 나의 짜증의 근원은 나이먹은 미혼의 연애에 간섭하는 엄마와 중년 미용실 사장님의 걱정 총공세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는 만나보겠다는 나의 변덕과 함께 속전속결로 그 남자와 동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약속을 잡게 됐다.
오랫만에 프릴이 달린 여성스러운 옷을 구입했고 속눈썹펌까지 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내 눈이 모처럼만에 엄청 예뻐보였다. 그러나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목에서 부터 어깨까지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집에서 발이나 씻고 넷플릭스나 봤으면 좋겠네. 오랫만에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으니까 불편해. 화장하는것도 힘들어. 머리 드라이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걸렸었나? 나를 맘에 안들어하면 어떻하지?'
소개팅을 앞두고도 오로지 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나는 애초에 나의 소개팅 상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간만에 브라우스에 청바지를 쫙빼입고 길을 나섰다. 그를 만나러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는 상가 엘레베이터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울꺼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내 눈은 거의 촛점이 없고 힘이 풀린 상태였다. 하도 긴장을 해서 어깨는 바짝 올라간 상태였다. 바짝 솟은 승모근은 빨리 이 소개팅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소개팅 하던 이날은 여전히 코로나 여파가 거센 시기였다. 이 때의 '마기꾼' 논란을 피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 남성이 놀랄 것을 대비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마스크를 미리 벗어두었다. 역시나 내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다. 나의 배려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상대방 남성은 먼저 도착하지 않았다.
'느낌이 좀 그런데.....'
나는 혼자 빈 테이블에 앉아 미용실 사장님이 소개해준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상대방 남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긴장되는 나의 불안한 상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
그러다가 문뜩 예전에 드라마 '하얀거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창 명민좌에 빠져있을 때 일부러 찾아 보았던 드라마였는데. 장준혁의 와이프가 선보기 싫다고 그의 아버지에게 징징대며 거부하며 난리쳤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선보는 자리에 명민좌. 아니 장준혁이 똭! 하고 나타나자 마자 생각이 180도 바뀌며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고 집착하게 되는 캐릭터로 변모한 것 이다.
갑자기 그 장면이 생각나자 마자...나에게도 설레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만나보자...막상 만나보면 생각이 바뀔수도 있어"
그렇게 잠시나마 철없이 백마탄왕자님을 상상해보며 한 1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소개팅 상대 남자가 마스크를 벗으며 나타났다.
.
.
.
"안녕하세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작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았다.
나도 멋쩍게 인사를 했다.
"안...안녕하세요"
오랫만에 이성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신기했다.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본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면도를 하긴했는데 거뭇거뭇하게 올라오고 있는 털을 보니 이사람은 털이 많은 타입이구나. 남자는 남자구나'
별생각을 다 했다.
우리 둘은 그렇게 가까이 앉아서 가족, 친구, 직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재미가 없었다.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
이 나이에 도파민에 절어있는 연애는 기대도 안한다고 하지만, 그냥 앉아있는거 자체가 벌받는 느낌의 소개팅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그가 좀 이해가 되지않았다.
그도 나의 취미나 성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둘은 직감적으로 서로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반백수 상태인 나에게 '한 직장에서 오래 다닌다는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30대 후반까지 결혼 못해 이 자리에 나온 나에게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니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지으며
"흠! 글쎄요"
그 대답만이 끝이었다.
뭐 이걸 삐딱하게 생각한다기 보다는 뭐 그냥 대화자체가 지금의 나하고는 안 맞는 사람이구나를 느꼈던 것 이다. 내 자격지심일수도 있고. 뭔가 답을 알고 있어도 굳이 말 해야 할 필요성도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지금 내가 여기 앉아서 뭘하고 있는지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랬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 감칠맛이라고는 1도 안 느껴지는 눈 앞의 파스타처럼 시간은 그렇게 밍밍하게 흘러갔다.
헤어질무렵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 소개팅 근데 도대체 누가 주선한거예요?"
그는 진심으로 모르는 듯 했다.
나는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우리 아파트 상가 미용실 사장님이요"
그 대답을 듣고는 그 남자는 "아...!"하는 표정과 함께 놀란 듯 보였다.
예의상 되 물어봐야 하는데 난 되물어볼 기력도 없었다.
그 남자가 알아서 대답했다.
"신기하네. 난 내 여동생이 하두 나가보래서 나온거였는데"
드디어 답이 나온 듯 했다. 둘 다 나이 40줄에 가족에게 등떠밀려 나온 소개팅, 아니 중매자리였으니 불이 붙을리 있었으리랴. 게다가 남자는 주말근무도 어렵게 빼서 나온 자리라는데 영 지쳐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말 건조하다 못해 메말라가는 이 중매자리는 마무리도 그렇게 '바사삭' 부서지는 한 겨울철 장작처럼 어떤 흔적도, 여운도 없이 사라지도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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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30년 단골 미용실. 난 아직도 사장님을 피해다닌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사람 좋게도 그 미용실 사장님과 연을 이어가며 오늘도 머리를 자르고 왔다고 어떠냐고 묻고 있다. 어른들의 세계관은 역시 인생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이해심과 '그럴수도 있지'라는 마인드로 마치 없었던 일 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며 그렇게 흘려보내는게 가능하다 싶다.
난 아직 그래도 조금의 소녀갬성은 남아 있나보다. 아직도 미용실의 커다란 창에 비치는 사장님이 보일때면 알아서 피해다닌다. 민망하다는 그 이유 하나다. 나는 역시 어른이 되려면 아직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