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는 이름모를 지역주간지의 취재기자였습니다.
"그게 경력이 된다고?"
실제로 들은 말은 아니지만, 그런식으로 들린적은 많았다.
나는 지역주간지의 취재기자로서 20대를 특별하고 재밌는 추억을 빽뺵히 채워나나갈 수 있었다. 그 나이에 만나기 힘든 지역 정치인이나 시의원, 관공서의 관리자급 이상 직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소상공인들과 시민단체, 후원단체 등도 만나면서 다양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채로운 사건사고들을 접하면서 내가 알던 작은 세상의 눈을 크게 키울 수 있었던 계기였었다고 생각한다.
시의회 의원실도 많이 찾아가고, 시위대도 찾아가고, 주민들이 제보한 민원 현장도 찾아가고, 구형 대포카메라와 함께 나름의 열정을 불태웠었다. 나름 나중에는 조금은 친해진 시의원과 함께 부서진 보도블럭을 파헤치고, 무거운 맨홀뚜껑도 열어가면서 민원 현장을 찾아가 작은 기사거리도 주워먹기도 했다. 비록 거창한 사건은 아닐지라도 이렇게 현장을 찾아 취재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적성에 맞는 듯 했다.
특히 시의회의 행정사무감사 기간이면 밤 늦게까지 직접 방청을 해가며 열심히 취재수첩에 각 과마다 예산집행에 관한 적합성, 지역개발사업 논의, 민원사항에 대한 조치 등등 각 카테고리까지 만들어가면서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었다.
워낙 배경지식이 부족한지라 대표님과 사수기자에게 배워가면서 기사를 작성했었는데 많이 서툴렀다. 나에게 기사작성법을 가르쳐주었던 L사수기자는 현재에도 나름 경기도에서는 메이저로 손꼽히는 일간지에서 오랫동안 잘 일하고 있다. 특히 내 사수였던 L기자와 나는 2인 1조가 되어 직접 신문배달을 했었다. L기자가 운전을 하고 나는 뭉텡이를 집어들어 관공서 앞에 놓인 신문 가판대에 올려 놓는 일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짠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한 번은 신문더미 한 다발을 들고 눈 밭을 걸어가다가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수십장의 신문더미의 가장자리가 눈 때문에 젖어버려서 서러움에 눈물이 난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몇몇 소상공인 대표님들과 지역유지분들이 광고를 붙여주시곤 했다. 나름 대표님의 사교성과 발이 넓은 기질 덕분에 라포형성이 잘 된 지역신문사였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는 신문사 운영이었지만.
게다가 마감때면 직접 인쇄소와 연락을 해 최종 PDF파일을 확인하고 오타와 잘못된 광고문구를 골라내는 일을 했었는데 이에 집중하다가 보면 밤 늦게까지 일하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지역에서 워낙 많은 일을 벌리다보니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의 홍보요원이나 모니터단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아서 인연을 맺어 몇 년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참 많은 추억들이 있는 지역주간지에서의 취재기자 생활이었는데 어딜가서 이에 대해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미 '00신문'이라는 자체가 네임밸류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경력이 되겠냐고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나는 반론도 안하고 변명도 하지 않는다. 내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그들은 어차피 궁금해 하지 않고 '00신문'에 빗대여 나를 깎아내릴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열정으로 일했던지 그들에게는 궁금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저 작은 신문사에 박봉으로 허덕이는 허울만 그럴싸한 기자같지도 않는 기자일뿐이다.
나는 이 떄의 경험을 입 밖으로 내기보다 내 안에 담아두기로 했다.
내 경험속에 스며들게 해서 나만의 단단한 '내공'으로 만드는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의 다양하고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어떤식으로든 증명해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들어 더 많이 들었다. 그것이 대놓고 과시할 수 있는 어떤 경력이나 스펙으로 이어지지 못하지만 말이다.
부족하지만 난 내 앞의 상황에서 최선과 열정을 다했고 내 일을 사랑했었다. 그런 진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역신문기자로서의 3여년 간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때의 내공덕분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