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비 오는 날의 위로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씩 변하는 날이 있다.

by 라뮈

나는 계속해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 건강하게 살이 찌는 느낌은 아니었다. 짜고 매운 음식, 감칠맛이 느껴지는 스낵, 과일을 갈아서 만든 달달한 음료수 등에 중독이 되어갔다. 시간은 많았지만 스스로 요리를 만들 에너지는 없었다. 항상 혼자서는 사 먹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고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매일아침 얼굴과 다리는 퉁퉁부어갔다. 얼굴에 생기있는 표정이 사라졌고, 뱃살과 허벅지에는 근력이 하나 없는 물살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움직이기가 싫었다. 뭔가 능동적으로 행동을 할 수도, 판단을 할 수도 없는 상태 같았다.


내가 다시 일도 하고 사랑도 할 수 있을까? 나도 남들처럼만 살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힘들었다. 청년층과 신혼부부를 위해 만들었다는 우리 동네 근처의 행복주택은 3억 이상이란다. 도대체 이 돈을 언제 모을 수 있을까? 방구석에서는 뭐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갑갑하기만 했다.


나는 점점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작은 내 방 공간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가끔 문 밖에서는 엄마와 아빠의 투닥거리는 신경질적인 다툼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가끔 고모의 근황도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작은 서점을 연상케 했던 고모의 '라라패리스'와 근처의 '달. 카페'가 떠오를 뿐이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니 그 순간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렇게 살다가 내 인생 끝나는 거 아닌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할 참이었다. 마침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다행히도 이 빗소리가 마치 나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처럼 들렸다. 작은 빗방울은 점점 빗줄기로 변해갔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두둑 두두둑.... 우두둑'


뭔가 시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빗소리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비 오는 풍경이 궁금해져 커튼을 쳐냈다. 창 밖의 회색건물들이 빗물에 눅눅히 젖어가는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창문너머의 비오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 속에서는 이름 모를 여자 아나운서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와서 청량하게 느껴지는 기분까지 들어서인지 울적한 기분은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비 오는 날과 어울리는 옛날 가요와 팝송이 흘러나왔다. 빗방울처럼 통통튀는 듯한 리듬의 필 콜린스의 'two hearts'처럼 경쾌한 곡들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게다가 비오는 날이면 항상 빼놓지 않고 들려오는 김건모의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까지.


창 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도시의 빗줄기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바빴을 때는 이런 날씨조차 짜증 나고 울적했었지만 오늘은 상큼했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들의 초록빛이 더욱 생기있게 빛나보였다.


"그래... 뭐 이렇게 평생 살겠어? 이렇게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도 생각과 행동이 수십 번씩 바뀌는데... 결국엔 다시 움직일 거잖아. 지금은 내려놓자. 복잡한 생각은 그만하고. 힘들었잖아. 항상 바빴잖아. 오늘처럼 늘어지게 침대에 누워서 빗소리도 감상해 보고 살아봐야지"


나는 품백을 샀을 때 보다 더 짜릿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항상 비 오는 날에는 새로 산 옷과 가방에 빗물이 묻을까 봐 걱정했고, 출퇴근하기 어려운 날씨라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비 내리는 소리'가 위로의 멜로디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누워있을 만큼 누워있고, 빗소리를 감상하고, 창 밖의 도시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듯한 여유였다.


두 두둑둑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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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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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참을 빗소리에 취해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온전히 느껴보았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그 포근한 온기에 묻혀 한동안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무기력한 마음이 들었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 조금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낡은 트레이닝복 한 벌 그대로 입은 채, 망가져가는 싸구려 비닐우산을 들고 집 밖을 빠져나왔다. 보슬비가 내리는 오후, 캄캄한 밤이 찾아오기 전에 잠시나마 걷고 싶었다. 나는 가벼운 비닐우산을 쓴 채로 동네 한 바퀴를 걸었다. 아주 천천히......

움츠려 있던 몸과 마음이 다시 활기를 찾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동네의 한 골목에서 새로 생긴 카페를 발견했다. 오전에 이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두 잔이나 마신 탓에 더 이상 커피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 메뉴판을 살펴보았는데 눈에 띄는 메뉴가 있었다.


'페퍼민트 차'


나는 오늘처럼 상쾌한 비 오는 날의 감성을 저녁까지 유지하고 싶었기에 이 차로 선택하기로 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도 맵고 짜기로 유명한 모 상표 라면에 청양고추와 계란 2개 까지 넣어 먹었으니 텁텁했다. 뭔가 상쾌한 것이 몸에서 요구하고 있었다.


따듯하지만 시원한 차.


차가운 몸과 마음을 녹여주면서도 나의 상쾌한 기분을 유지시시켜 줄 것 같았다.


투명한 내열 유리잔에 담긴 페퍼민트차가 담겨 왔다. 그 위에 초록빛 패퍼민트 잎과 함께. 비 오는 날과 잘 어울리는 차 한 잔이었다.



그렇게 동네마실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긴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마음을 고쳐보자는 다짐과 함께. 이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희망이 샘솟는 듯했다.


나는 거의 찢어져 뒤로 고꾸라질 듯한 투명우산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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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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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 거실에서 엄마와 아빠가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마음에는 다시 암울한 기운이 슬그머니 들어서고 있었다.


엄마아빠가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것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왠지 이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그래. 다 나 때문에. 다 큰 딸이 결혼도 못하고 직장도 잃고 지 앞가림도 못하니까 내가 엄마 아빠의 집에 그늘이 지게 한 거야! 다 나 때문이야! 그놈의 페퍼민트 차가 뭐고, 빗소리가 다 뭐야! 사는 게 이따윈데!!!!!'


나는 다시 싸구려 비닐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바깥에서 방황하고 돌아오자고 다짐했을 때였다.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가 귀에 또릿하게 들려왔다.





" 라라패리스는 당신이 초반에 돈을 많이 보태줘서 살 수 있었던 거잖아. 물론 그게 아버님 어머님 재산이었다지만, 당신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딸에게도 재산이 가게 한 거고!! 당신네 형들과 형수들은 양심도 없지!! 이제 다 죽어가는 통에 연락해서는 간병비 보태겠다는 말은 1도 없고, 그 싸구려 집 재산이나 노리고 있다지?"


-"당신 말 조심해!! 다 죽어간다니!! 기영이는 그렇게 나약한 애 아니야. 안 그래도 라라패리스 월세도 나갈 기미가 안 보이는데 당신까지 나 이렇게 스트레스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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