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은 그렇게 달. 카페에서 마주치고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양순은 괜히 자신의 옷깃을 매만지며 입꼬리를 내리고 눈동자를 치켜뜨더니, 결국은 인사를 건네겠다는 듯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먹는 커피를 바라보더니 뾰루퉁하게 한 마디 던졌다.
"밤바람도 추운데...아이스? 그것도 커피? 잠 못잘텐데...."
-"그러는 우리 이웃님도 방금 아이스 바닐라 라떼 시키시지 않으셨어요?"
내가 받아치자 양순은 더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더니 말했다.
"그것은....나야 이 동네 별종이니까...이런 도시 변두리에서 누가 밤늦게 커피를 먹는다고! 해만 넘어가면 잠자기 바쁜 동네인데. 나야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떄는 야근을 밥 먹듯이 했으니까..그 습관을 못버려서 그런거고....아니, 어쩄든 조카님도 참 범상치가 않네!"
-"그렇죠...저도 뭐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오늘 하루 고단하기도 했고......"
"그렇지. 오늘 101호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심란해서 유독 더 피곤하다니까......나도 남편이 없어서 그 심정....킁킁....어쨌든, 많이 아프지 말아야 할텐데...그래요. 밤 커피 잘 즐기고 정신 버쩍 차리고 돌아가쇼. 조카!"
양순은 말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더니 갑자기 작별인사로 급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이웃이 고모곁에 있어줘서.
-"네...우리 웅이 돌바주신다고 하시니 어쨌든 여러모로 감사해요"
"어. 글고, 아까 101호가 나한테도 신신당부 하던데. 그 댁 아버지한테는 당분간 알리지 말라고 하네? 어차피 당분간은 간호간병 병실에서 혼자 입원해서 지내도 될 상황이라고 하니까. 조카님은 아버지께 알리지 마쇼. 그 당분간은 내가 신경쓰고 있을 것이니께. 그 양반이 괜히 그럴양반은 아니고. 뭐 지금 상황을 정리해서 친척들한테 말을 전달하려고 하는 거니까. 일단 오늘 일은 돌아가서 부모님께 말하지 마쇼"
-"...................................."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싶었는데. 고모의 가까운 이웃이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당분간은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왠지 '네' 라고 확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밤하늘의 초승달을 쳐다보았다. 그 옆에 반짝이는 별들 까지도.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한 채 각자의 테이블에 앉았다. 양순은 카페의 바리스타가 서있는 바로 앞, 바(Bar)형태의 테이블에 앉아서 자신의 커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리스타 문선과 잘 아는 사이인지 둘의 대화는 꽤나 친근해 보였다.
"어...깜짝이야. 뭐여? 머리가 그게. 그래도 뭐 나쁘지 않네. 인상이 더 샤프해보이는게 완전 딴 사람같고. 우리 딸래미 말처럼 완전 '힙'하네"
-"양순누님이 저보고 너무 착해보인다면서요. 여자들은 그런거 안 좋아하니까, 그래서 차인거라면서요. 마음먹고 바버샵 좀 들렀어요. 이미지 변신이 필요한거 같아서요. 괜찮아요?"
"음 맞어. 머리 스타일 하나로 완전 서울남자같아. 성공적이여. 여기 변두리 남자 안 같아"
-"뭐야. 그런말이 어딨어요. 여기 변두리 남자들이 시간이 많고 여유가 많아서 그런지 더 멋부리는 구먼"
"크항항항항"
-"커피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저는 여기 에스프레소 잔들이랑 기구들 좀 정리하고 있을께요"
이 둘은 짧지만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서는 또 다시 각자의 시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카페 내부에는 테이블이 거의 꽉 찰 정도로 손님들이 많이 있었지만, 매우 차분한 분위기였다. 한밤 중의 별과 달처럼 각자의 시간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느 손님은 책을 가져와서 독서를 하고 있었고, 뜨개질을 가져와서 손뜨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다이어리와 키치한 스티커들을 잔뜩 가져와서는 친구들과 다꾸(아이어리 꾸미기)를 하기도 했고, 특히 나 처럼 차 한잔을 시켜놓고 테이블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연을 안고 동네카페인 '달. 카페'에 와서는 평화로운 쉼의 시간을 보내는 듯 했다.
나는 이 달. 카페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평일에는 오밤중에만 운영하는 것도 신기했고, 옛날 한옥집을 이렇게 멋스럽게 리모델링한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카페일까? 밤에 운영되는 카페인 만큼 메뉴도 그에 걸맞는 차와 커피들이 제공되고 있었다. 잠자기 전 숙면하는데 방해되지 않을법한 '릴랙스'한 느낌을 주는차의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카모마일 차, 루이보스 차, 국화 차, 대추차 , 라벤더 차, 쌍화차, 타트체리에이드, 레몬밤에이드......' 물론 디카페인 커피 종류도 다양하게 준비돼 있었다. 달빛 그늘 아래서 따듯한 차 한잔과 함께 하루의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매료되고 있었다. 나는 달.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손님들을 살짝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스커피 먹는 사람은 저 양순이라는 여자하고 나, 오직 둘 뿐이네. 나도 별종인가?'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의 마무리를 짓고,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끝맺음을 짓고 있었을 때였다. 이 카페에 오기를 잘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고 시원한 커피 한 잔에 뜨뜨미지근해진 머릿속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집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 잔을 다 비워내고, 테이블 위에 놓여진 내 소지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달카페의 출입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젊은 여자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문사장님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 이요. 디카페인 절대 아니고 쎈걸로. 쓰리샷으로. 속이 탄다. 속이타!!!"
20대로 보이는 이 여자는 발랄한 단발머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양순은 반갑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이 지금왔어? 지금 밤일 가야 하는 시간 아니야?"
-"가야죠. 언니! 그 전에...우리 독서회장님. 응급실 갔다면서요. 진짜 어떻게 해요!"
"지금 고비는 넘겼어. 너무 걱정하지마. 지금은 잠도 자고 안정 잘 취하고 있어"
-"아씨. 우리 회장님 이리 된 것도 모르고. 철없이 아가사 크리스티 책 빌려달라고 문자로 징징댔는데...힝. 언니 이제 어떻게 해!!"
"진정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샷 때리고 일 갔다와서 또 의논해 보자. 어여 한 잔해. 밤일 하려면 정신 차려야지"
이 두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양순과 눈이 마주쳤다. 양순은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그 젊은 여자에게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여기...이분은 우리 독서회장님, 101호 조카셔"
나는 왠지모르게 눈치를 보고는 젊은 여자에게 눈인사를 했다. 이 젊은 여자도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 밤 늦은 시간에 일을 간다고? 우리가 고모가 독서 회장님? 다들 아는 사이인가 보네. 우리 가족. 친척들보다 더 걱정하는거 같고'
나는 눈인사를 하고 어색하게 말없이 서있었다. 그런 내 표정을 살핀 양순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한 마디 했다.
"여기 별종 한 명 더 추가요"
늦은 밤 시간의 '달. 카페' 아이스커피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 혹은 시작하려는 세 여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