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이 여자가 내 사정을 아는건지 '고모가 어쩌고, 친척이 어쩌고' 하는거 보니 도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웅이의 꼬리가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그녀를 무척이나 반기는 듯 앞발을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누..누구세요? 왜 남의 집에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들어오신거예요? 도둑같아보이지는 않은데..."
그녀는 자신의 손을 요란스럽게 휘저어가며 떨어진 호미를 주웠다. 그녀의 손놀림에 '흠짓'하고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해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삐죽거리는 얇은 입술로 말했다.
"내가 모르는 조카라니, 재밌군. 라라패리스 10년 이웃으로서 아니, 지금은 내가 이사가버려서 아니지만. 어쨌든. 그동안 아무도 안 찾아오고, 개인사는 말도 안하길래 '쌩'독신인줄 알았는데 조카도 찾아오다니. 재밌는 사람이었네. 나 몰래 애인도 있었던거 아니야?"
왠지 이 깐깐해보이는 여자의 삐죽거리는 모습도 거슬렸거니와 '쌩독신'이라는 표현이 어처구니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공격적으로 말대꾸를 했다.
-"우리 고모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에요. 재밌는 사람도 아니고, 쌩독신도 아니예요!"
나의 반격을 하는 듯한 말대꾸에 조금 놀랐는지 이 여자는 눈을 크게 뜨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괜시리 뻘쭘하게 웅이의 밥그릇을 웅이에게 가까이 대어 놓으며 더 먹으라는 듯 손짓을 할뿐이었다. 그러더니 내 눈치를 보다가, 자신의 손전등으로 고모의 서재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나도 그 빛을 따라 어둠속에서 보이는 서재를 바라보았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다양한 책들이 빼곡히 채워져있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입에서는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와.....!"
고모는 명문대 출신에 졸업 후에는 바로 공공기관에 취업이 되어서 평생 먹고 사는데에는 문제가 없던 사람이었다. 아빠말에 따르면 고모는 공직생활을 일찍이 시작하다보니 어르신들에게 1등 신부감으로 손꼽히곤 했다고 한다. 선도 수도 없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다 60넘도록 독신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친척들은 그녀를 쉽게 뒷담화 소재로 삼았다. 책이나 끼고 살면서 여자로서 꾸밀지도 모르는 고모가 답답해보인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볼 때 고모는 완벽해보였다.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고모의 모습은 독서를 좋아해서 어린 나에게도 동화책을 자주 읽어주곤 했던 순간들이었다. 그 와중에 몇몇 깨어있는(?) 친척 어른들은 "여자들도 능력있으면 결혼 안 해도 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같은 독신이라도 고모와 나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고모는 어른들이 말하는 능력있어서 결혼 안해도 되는 여자였다. 그래서 다행이도(?) 편견이 심했던 옛날 그 시절에도 그럭저럭 주변을 수긍시켰던 독신이었다.
큰 벽 한 쪽을 가득 메운 책들을 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베스트셀러 소설부터 시작해서 추리소설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가득 차 있었고, 유명 작가들 별로 구역을 나누어 그들의 책을 모아두었다. 마치 작은 독립서점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포근한 달빛에 비춰진 고모의 다이닝룸의 서재. 그리고 다정한 웅이까지. 완벽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런 낭만적인 기분이 몽글몽글하게 올라오려고 할 때 갑자기, 호미를 든 깡마른 여자는 다이닝룸의 큰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자신의 등산베낭에서 두꺼운 세 권의 책을 꺼냈다.
'살인의 고차원적 기억'
'산장의 못된 시정잡배'
'어둠의 불량배들의 낭만'
나는 생각했다.
'어휴 진짜. 아줌마. 자기같은 책들만 읽네'
내가 인상을 찡그려가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 여자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난 댁 고모의 오랜 이웃 양순이라고 하오. 이 책들 정말 재밌어. 역시 101호랑은 취향이 통해. 시간나면 읽어보쇼. 그쪽 백수라고 소문났고만"
-"누가... 제가 백수인것 까지 소문냈어요?"
"꼭 말해야 아나? 그 나이대 양반이 대낮에 하루종일 병원에서 츄리닝바람으로 병실을 지켰을 정도면 백수아니야? 그건 그렇고, 아까 고모 어쩌고 한건 맘에 담아두지 마쇼. 내가 당했어서 그래. 오랫만에 연락된 고모한테 돈 뜯겨서. 하기사 모든 세상일이 내 경험을 바탕으로만 돌아가진 않으니까. 그리고 101호 이 위인도 그럴만한 그릇은 못돼고. 어쨌든 나도 나쁜사람 아니야!!"
이 중년의 여자는 자기는 다짜고짜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서 호통을 치더니, 호미와 낡아빠진 촌스런 등산베낭을 챙겨 '호다닥' 다이닝룸의 작은 문으로 연결된 테라스로 빠져나갔다.
'진짜 어이없네. 정말'
나는 그 여자가 놓고간 책 세 권을 '공포'나 '추리' 장르의 책을 모아놓은 듯한 책장의 빈곳에 나란히 채워놓았다. 그리고 웅이가 먹은 밥그릇을 치우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웅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또 다시 야외 테라스 방향의 작은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또 그 여자였다. 나는 너무 놀란나머지 호통치듯이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고 그래요? 그것도 야심한 밤에!"
-"아! 정작 중요한 얘길 안하고 갔네. 웅이 끼니는 걱정하지 마쇼. 내일부터 내가 틈나는 대로 챙겨주기로 했으니까! 오늘 이상하게 피곤한 날이네! 어쨌든 문단속 잘 해주고 돌아가시요. 101호 조카!그리고 웅이도 굿나잇!"
'쾅'
그녀는 자신의 할 말만을 한 채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나야말로 오늘 이상하게 피곤하다. 피곤해'
나는 웅이를 쓰다듬어 주었고, 밥을 먹고 배가 불렀는지 서서히 잠에 들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후 고모의 집을 빠져나왔다.
나는 라라패리스를 빠져나와 혼자서 시골과 도시 그 중간쯤인 서울 변두리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은 시간이었고,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피곤했다. 고모가 쓰러지고 병원에 이송되기까지. 이 라라패리스에서 만난 웅이와 오랜이웃까지. 계속 긴장을 하고, 의심을 하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했다. 하루종일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내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내려 앉은 것 같았다. 무거운 긴장에 눌려있던 탓인지 괜한 호기심때문에 라라패리스에 왔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또 아빠에게는 정말 오늘의 상황을 말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머리가 복잡하고 심난했다. 마을버스 정류장에 다달았을 때 였다.
이상하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말이다. 원두커피를 내리는 냄새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커피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달 커피' 라는 작은 간판이 보이는 한옥카페였다.
'달...커피?'
나는 커피냄새를 맡고서는 홀린 듯이 달 커피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낮 시간 내내 긴장했는지 피곤했다. 오늘 잠은 자거나 말거나 커피 한 잔이 절실했다. 큼지막한 통창너머로 따듯한 오렌지빛 조명이 반겨주는, 원목의 포근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카페였다. 나는 문을 열고 카페 안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