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팰리스
나는 버스를 타고 달리고 달렸다. 시간 많은 백수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딱히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디론가 떠나는 것. 그것이 여행 아니겠는가.
나도 한창 회사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을 때에는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을 방문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하는 등의 여행을 즐겼다. 돈이 어느정도 모아졌을 때는 견문을 더 넓혀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참 즐거웠고 행복했다.
이제는 그것들조차 너무 먼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왠지 이 나이에 자가 집도 없는데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정말 철없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제 잃을 것도 없는 백수 노처녀인데 이와중에 남의 시선을 신경쓴다니, 또 아이러니. 그래 한 번뿐인 인생 내 마음 가는대로 하는거지. 그에 대한 책임과 원망만 남에게 묻지 말자.
"라라라라라........"
나는 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길가의 가로수길, 러닝을 즐기는 사람, 귀에 이어폰을 꽃고 산책을 하는 사람, 예쁜 옷들을 파는 상점, 분위기 좋은 카페, 쏟아지는 햇살......
괜찮은 여행이다.
바쁘게 살 때에는 이런 풍경은 그저 흔하디 흔한 일상일뿐이었는데. 오늘은 모두 새롭게 보인다.
그래서 '시간이 많은 사람들'을 진정한 부자라고 하나보다. 바쁠땐 그저 지루하고 싫은 일상의 길거리였는데......사람들의 패션과 표정, 손에 들고 있는 커피의 브랜드까지 특별하게 보이는, 모두 반짝거리는 소중한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하나보다. 허나 그 '여유'라는게 현대인에게 그 어떤 사치품보다 더 갖기 어려운 것 같다.
"라라리라라라리~~"
그때 곧 내 머리속을 스쳐가는 단 한 단어가 떠올랐다.
"라라? 라라팰리스?"
나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고모의 라라팰리스를 핸드폰으로 검색했고 버스를 2번 만 갈아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챘다. 서울버스와 마을버스, 나는 그렇게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고 서울 외각의 경기도에 있는 라라팰리스에 도착했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수도권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게 한적한 전원마을을 만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호수가 나왔고, 교통은 딱히 편리한 편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도시 지하철까지 연결되는 마을버스도 있었다. 라라팰리스로 들어가는 길에는 낡은 시골집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새로 지어진 듯한 단독주택도 많이 보였다. 길바닥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살짝 스산한 분위기도 있었다.
"뭐야 월 60이라고 해서 저렴한 줄 알았는데....이런 변두리 촌구석에 60이면 비싼거 아니야??"
그도 그럴것이 주변 상가 1층은 공실로 가득했으며 10여년전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던 패밀리레스토랑도 폐점한 상태였다.
"예전엔 단독주택도 많아서 엄청 좋은 동네처럼 느껴졌는데......스산하게 느껴지는게...어찌 빈집도 좀 보이는 것 같고...상가는 공실이 많네"
나는 스마트폰에서 안내하는 길을 따라 계속 걷고 걸었다. 라라팰리스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그때, 내 눈앞에는 검은 물체가 재빨리 스쳐지나갔다.
"와아아아악!!!!!!!!!"
나는 놀란 나머지 우악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무 빠르고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시커멓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 물체가 귀신이나 망령이 아닌건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내 눈 앞에는 상당히 멋스럽게 생긴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뭐...뭐야! 고양이였어?"
목에 방울은 없었고, 털을 정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길고양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호박색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강렬하게 한 번 노려보더니 호수쪽으로 달아났다. 마치 나를 보고 비웃기라도 하듯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이다.
"뭐야 이 동네...진짜 깜짝 놀랬네"
고양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 나타났다. 드디어 내 핸드폰에서는 종착지를 알려주는 알림음이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나는 뭔지모를 두근거림과 함께 라라팰리스 앞에 도착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고모가 살고 있는 1층 창문은 새하얀 창틀이 인상적이었다 주변의 나무와 꽃들과 잘 어우러지는 창문이었다. 창문 안쪽에는 꽃무늬가 수놓아진, 튼튼한 광목천으로 만들어진 베이지색 커튼이 예쁘게 양쪽으로 묶여있었다. 낡은 빨간 벽돌집과 잘 어우러져 마치 인형의 집 같았다.
'역시 예쁜 집 같아'
나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게 까치발을 하고 창가쪽으로 가까이 '살금살금' 다가가 고모의 집 내부를 살짝 엿보았다. 10여년 전에 고모집을 방문한 기억이 있었기에 그녀의 집이 어느 방향에 위치해 있는지 정도는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는 30대가 된 이후로 고모를 보지를 못했다. 나는 친척 어른들과 살갑게 지내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30넘어서 결혼을 안 한 사람은 나뿐인지라 왠지 그 친척모임에 가는 것이 꺼려졌다. 별종취급을 당할테고 "빨리 시집가라"는 뻔한 레파토리도 한 귀로 흘릴 수 없을 만큼 짜증이 나있는 '미운 30살'이었기에 나는 더욱 친척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예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독신인 고모도 혼자서 먹고사느라 고군분투했는지 우리 가족과 자주 연락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고모네 집 하얀 창문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가까이 대고 자세히 내부들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신식 싱크대는 아니지만 깔끔하게 정돈돼 있는 하얀 싱크대와 함께 구식 냉장고도 보였다. 그 구식 냉장고 위에는 새빨간 장미꽃무늬 자수가 놓여진 하얀 천이, 장식처럼 덮여 있었는데 나름 예뻐보였다. 그 앞에는 큰 원형테이블이 놓여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하얀 식탁보가 씌여져 있었다. 그 원형테이블은 크기가 꽤 컸는데 꽤 튼튼해 보이는 원목으로 만들어진 앤틱가구같아 보였다. 뭔가 최신식은 아닌데, 값어치가 나가보이는 테이블이어서 촌스러운 느낌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급 앤틱의 느낌도 아니었다.
'툭'
"어엇....!"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원형 탁자위로 어떤 한 여자가 거의 쓰러지듯 자신의 팔을 베고 엎드려 누웠기때문이다
"고...고모인가?"
나는 더 자세하게 창문 안을 살펴 보였다. 그 여자는 자신의 팔을 테이블에 얹어놓고는 눈을 감고서 꼼짝 않고 있었다. 집안일이 힘들었는지 엎드리고 있는 자세에 살짝 보이는 얼굴의 옆모습에는 고단함이 묻어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자는 고모가 맞는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나 주름도 늘고, 인상도 변했지만 내가 아는 고모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한참을 창문 밖에 서서 테이블에서 자신의 팔을 베고 엎드려 있는 고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의아했다.
"곧 요양원에 들어간다더니 하던 일은 그만둔건가. 고모가 지금 이 시간에 집안에 있을리가 없는데. 어렸을 때 고모가 인형많이 사줬지. 엄마,아빠가 안 사주는 구접스러운 인형같은거. 잔정은 많은 사람이었는데. 고모도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런데 막상 지금 들어가서 고모랑 살갑게 말 할 자신은 없어. 어렸을 때 추억이 전부지. 만난지 오래되서 지금 만나게 되면 어색할 것 같아. 할 말도 없고. 오늘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한참을 별의 별 생각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휘이익~~~'
"뭐...뭐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서는, 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 마주쳤던 호박색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었다. 그 검은 고양이는 재빠르게 고모집의 창문틀로 달려가더니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내세운 앞 발로 창문을 마구 긁어대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긁어대는지 '끽끽' 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어엇... 창문에 기스생기겠어! 저러다가 창문이 깨져버리면 고양이도, 고모도 위험할 텐데....!!!"
이미 창문에는 그 검은 고양의 발톱으로 인한 기스가 창문 곳곳에 잔뜩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야옹야옹'거리면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거야 도대체??"
나는 겁이 났지만 다시 한 번 고모의 집의 창문 쪽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고양이는 자신의 앞발로 창문을 긁어대고 있었고, 창문 속 테이블에 기대어 있는 고모는 여전히 꼼짝 않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팔을 기대 누운 채로 아까 그대로였다.
"고...고모?"
나는 놀란 나머지 창가 가까이 다가가 고모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그 검은 고양이는 내가 자기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고모의 입술은 보랏빛에서 점점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얼굴빛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안돼....병원으로! 병원으로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