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아. 오늘 커피 잘 마시고, 출근 잘 해. 나는 낮에 노가다가 너무 고단한데다 101호 저리되서 너무 신경썼더니 너무 피곤하다. 내일 이야기 하자'
-"알겠어요. 언니. 힝......"
나는 그렇게 달.카페를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긴장을 했던 탓인지 밤 늦게 먹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가 더욱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래 이 맛으로 밤 커피를 마시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겨우 마지막 마을버스에 올라 타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캄캄한 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지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한산한 지하철을 타본지 오랫만인 것 같았다. 항상 출퇴근 시간의 콩나무시루같은 지하철만 타봤기 때문에 피곤, 지침, 숨막힘, 우울, 절망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버거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보통 일상의 풍경은 오늘은 다른식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고층건물들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들 속 화려하고 풍족해보이는 사람들. 우울하고 지친사람들. 겉모습은 수려하지만 고되보이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이렇듯 도시의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수많은 건물과 공간 속에서도 나만을 위한 공간은 없다. 늘 익숙한 부모님의 집으로. '나'보다는 부모님의 딸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들어가서 아빠를 본다면 오늘 하루 일을 정말 말하지 말아야 할까. 예전의 나같으면 바로 말했을 것이다. 아빠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일은 나같은 작은 존재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고, 어떻게든 티가 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만은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는 한강다리를 쳐다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특히 아까 달.카페에서 잠시 마주쳤던 그 젊은 여자애가 생각났다. 짧은 단발머리가 귀엽고 동그란 눈이 예쁘장한 외모였다. 게다가 자기 엄마뻘로 보이는 양순에게 '언니'라고 말하면서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이 불편하게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그 둘은 친밀해보였기 때문이다.
아까 둘이 나눈 대화를 되짚어 보니 여러 추측들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아까 그 양순이라는 사람은 노가다를 한다고? 뭐. 그래. 옷차림이나 행동을 보니까 뭐 그렇게 지적인 직업을 가진것 처럼 보이진 않았어. 괴팍하게 한손에 호미를 들고다니는거 봐. 꽤 와일드하고.'
'그리고 아까 그 여자애는 뭐? 밤일? 옷차림이나 생김새는 그런 일 할 애로 안 보이던데. 하기사 요즘은 그렇게 수수해보이는 애들이 더 뒤에서 뭘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세상이니까'
나는 겉모습으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된다고 모순적인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뭐. 생각은 순전히 내 마음대로 하는거니까. 그리고 내 멋대로 판단을 해버렸다.
'끼리끼리 노는구만'
그러면서 인텔리 계층인 우리 고모와 가까운 이웃사이인 그들과는 '끼리끼리'가 아니라고. 결국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모순적인 판단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구직사이트를 뒤져보다가,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시립도서관에 들려서 공부를 한답시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하루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니 부정적인 생각이 연달아 들 때도 많았고, 부모님의 눈치를 볼 때도 많았다. 이렇게 어떤 소비도 없고, 꿈도 없고, 목적없이, 재미없게 살다가 결국나중에는 굶어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곤 했다.
도서관이 마감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오는데 단골 두부집에서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김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도 한 모에 5천 원이나 하는 손두부를 사기에는 백수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회사 다닐 때는 별고민 없이 샀었는데 말이다. 바로 옆 대형마트에 들리면 PB상품으로 나온 두부는 단 돈 1천 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 결국 대형마트를 가기로 했다. 그러나 눈에 띈 것은 손두부 집 매대 바로 앞에 콩비지 여러 묶음들 이었다. '콩비지 무료'라고 쓰여진 골판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매대 앞에 나온 사장님은 우리집 콩비지가 맛있다며 한 번 먹어보라며 권유했다. 맛있으면 나중에 두부도 사러 오라는 말과 함께. 나는 결국 무료로 나눠주는 콩비지 한 묶음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무료로 받아온 콩비지를 손에 들고와 엄마가 있는 주방 식탁 앞에 내던졌다. 엄마는 주방에서 깍두기를 담고 있었고, 갓 만든 멸치조림의 향기가 맛깔스럽게 코를 찌르고 있었다. 따듯한 주방의 온기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자랑하듯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자주 다니는 손두부집에서 무료로 가져가라길래 가져왔어. 여기다 쉰김치 넣고 비지찌게 끓여먹으면 맛있어!"
그러나 엄마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그런거 가져오지마. 누가 먹는다고"
내가 가져온 콩비지에 눈길 한 번 안주고 냉랭하는 반응하는 엄마의 모습에 순간 서운함을 느꼈다. 사실 몇 천원이 아쉬어 손두부는 못사고, 콩비지를 얻어온 사연도 있었기에 엄마의 반응은 내 자격지심을 건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세차게 말대꾸를 했다.
"싫으면 안 먹으면 되지! 뇝둬! 내가 끓여먹을꺼니까 신경쓰지마!!"
나는 콩비지를 냉장고 한 구석에 쑤셔 넣었다. 엄마의 냉장고이기에 눈에 보이는 곳에는 두지 못하고 내가 먹는 음료수와 소스 등을 넣어둔 한 구석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괜히 분한 마음에 문을 '쾅'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별거 아닌 것에 기분이 상했다. 기분이 점점 이상해져갔다. 엄마가 갑자기 왜 저러지. 그리고 내 방문소리에 놀란 아빠가 큰 소리로 한마디 더 거들었다.
"쟤는 다 큰 애가 문을 '쾅쾅' 닫고 그래? 지금 라라패리스 월세도 안 나가서 심란해 죽겠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말했다.
"요즘 그 동네 젊은 사람들 없어서, 상가공실도 많고, 아파트랑 주택들 가격도 말도 아니게 떨어졌다는데 한 달에 60이면 비싼거 아닌건가?"
-"그래도 20평이 넘어가는 집인데...누가 필요한 사람이 있겠지"
"하루종일 그것 때문에 당신 인상쓰고 다니고 나도 정말 죽겠어"
-"시영이 녀석이 말을 안해서 그렇지 병원비가 꽤 나갈꺼야. 월세로 보태야 돼. 곧 요양병원으로 옮겨질텐데. 본인도 병원에서 나오게 된다면 당분간 공기좋은 시골 엄마집에서 요양하기로 했고. 족히 1년 이상은 비워질 집인데 마냥 놀릴 수는 없어"
나는 방 안에서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서는 엄마의 예민함이 살짝은 이해가 갔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부모님 대화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곧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왔다. 어느정도 평화가 찾아온 듯 했다. 테이블 위에 밥상이 차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도 먹어봐"라는 엄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까 주방에서 엄마가 단촐하게 새우젓만 넣어서 만든 깍뚜기가 생각났다. 갓 만든 멸치볶음도 먹고 싶었다. 어느새 분위기가 조용해지고 나는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가기로 했다. 배고팠기 떄문이다.
나는 문을 열고 주방의 식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감은 예민함으로, 예민함은 신경질로 변했다.
갓 담근 깍뚜기와 멸치볶음은 반찬통에 담긴채로, 그릇으로 옮겨지지 않은 채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반찬통에 담긴 채로 갓 만든 깍뚜기와 멸치를 자신들의 침이 묻은젓가락으로 집어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