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범인 Sep 24. 2017

범죄학자인 것이 기쁘고 슬플 때

'범죄학자'라는 직업에 대한 고찰


그렇게 범죄학자가 되어보겠다고 공부를 해왔지만, 나 스스로를 범죄학자로 소개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그리고 아직은 흔히 말하는 활동기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 기간이 길지 않은 소위 신진학자로, 범죄학자로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벅찬 기쁨이나 내 존재가치를 흔들 만큼의 괴로운 슬픔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그 분류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범죄학'을 했기 때문에 얻은 것과 내가 '학문'을 했기 때문에 얻은 것들로.


이 글에서는 내가 '범죄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얻게 된 것들에 대해서만 논하려고 한다.



#1. '범죄학자'인 것이 기쁠 때


'학자'는 평생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 자신을 스스로 '학자'로 생각한 그 순간부터 학자인 거라고 그 누군가가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래도 공식적인 범죄학자가 '되기'까지 갖가지 힘들지만 기쁜 일들이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 학교에서 합격 연락이 왔을 때, 박사를 갈 때, 1차 자격시험을 모두 통과했을 때, 논문을 완성했을 때, 졸업 논문 발표를 끝냈을 때, 졸업을 했을 때.



이런 자잘한 기쁨들을 뒤로하고, 가장 최근에 느꼈던 '범죄학자'로서의 기쁨은, 내가 '범죄학자'임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안정감이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비 범죄학 전공자들도 범죄에 대해 '알고 싶은, 혹은 누군가가 신경 써서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혐오가 어떻게 범죄가 되는지', '일상생활에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범죄율이 관련이 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은 그간 단순히 미디어에서 소모되던 범죄 콘텐츠의 자극적이거나 극단적인 모습과 관련되었던 질문과는 다른 류의 질문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범죄학자는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고, 상세히 살펴보고 연구하고 있다'라고 했을 때의, 작게나마 안심하는 모습들이 나에게 '범죄학' 공부하길 잘했다 싶은 기쁨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내가 '범죄학'을 했기 때문에 얻은 가장 큰 기쁨은 근원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이유에 대한 답을 깨달았을 때가 아닐까 한다. 물론 나의 이상 속에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본격적으로 찾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관문(시험들과 지원과정, 기다림과 실패들)을 거쳐야 했고, '범죄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5년 여가 지나서야 그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해자가 만들어지는 원인'에 집중했었다. "왜 그들은?"이라고 항상 자문했지만, 나에게 그 원인은 단순하고도 일차원적이었다.


'불우한 가정과 이웃 환경, 불량한 친구들, 관심 없는 사회', 그리고 종종 '정신적 문제'라고 이야기 하지만, 모든 불우한 가정과 이웃, 불량한 친구들, 관심 없는 사회를 가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범죄자'들은 왜 범죄자가 되기를 선택한 걸까? 나는 공부를 해오면서 이에 대한 결론을 그들은 '그것(범죄)을 할 수 있고, 그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기 때문'으로 내렸다. 물론 여타 학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그것 말고도 다양한 변수가 있을 수 있음을 논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런 류의 '범죄자'에 대한 논쟁으로는 '앞으로의 범죄를 막는 것'에 내가 도움이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보는 게 더욱 정확하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고민을 하던 나에게 갑작스레 등장한 '앞으로의 범죄를 막는' 개념은 나에게 '범죄예방'이라는 키워드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범죄자의 원인을 찾는' 논쟁에서 '피해자를 발생시키지 않는'방향으로 나의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다 '피해자학(victimology)'을 발견했을 때. 그만큼의 기쁜 일은 흔치 않았다.


기존 '범죄자'의 관점과 '왜 범죄를 행하는가'가 거의 유일한 쟁점이던 범죄학이라는 학문에서, '피해자'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피해자학의 존재는 비교적 신흥 학문인 '범죄학'에 비해서도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학'으로만 빠져들어갈 수 없는 한계에 있었다.



#2. 범죄학자인 것에 자괴감이 들 때


피해자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잠재적 피해자를 줄이는 방법으로 사회적 환경적 변화를 꾀하는 방법. 두 번째는 피해 이후의 대처에 대해 연구하고 제안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분야는 첫 번째였지만, 대부분의 피해자학은 두 번째 분류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여러 가지를 탐색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 가까이 접근해 보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형태로 범죄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특히나 피해자학은 과거 어떠한 형태로든 '피해자 (혹은 '생존자'라고 칭하기도 한다)'와 관계가 있는 (본인 혹은 가족이나 지인) 경우가 많았고, 범죄의 피해자가 80%가량이 여성인 것과 유사하게 이를 전공하는 많은 이들이 여성이었다. 학문의 특성상 범죄피해 경험에 대한 기록과 그 해결 과정, 피해자(생존자)의 회복과정 등에 대해 접근해야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피해자학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나는 여러 범죄피해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벽한 객관화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이에 대해 나는 '전문가'로서의 자격이 없는 듯 보였다.


이는 내가 '범죄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을지. 그 근원적인 기반까지 흔들리는 문제였다.



결국 나는 피해자학에서 다루고 있는 첫 번째 분류, 범죄피해의 예방을 위해 사회환경적 변화를 연구하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이것이 나의 세부 전공 분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아무 소리도 없이 나의 머릿속에서 진행되었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내가 얻고자 했던 답을 얻었다는 기쁨도 주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었던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이후에는 더 많은 고뇌들이 생겼다.


막상 나부터도 정당하지 않은 일을 보았음에도 눈을 감는 일이 있고, 희롱이나 추행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날 수 없고, 주변에서 행해지고 겪고 있는 범죄와 피해에 명확한 해결점을 줄 수 없는 나 자신에게 환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최근 어느 남초 집단에 있는 여성인 후배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가 여전히 피해를 받는 것은 여성이고, 그 피해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을 때 다시 재피해를 받는 것도 여성이라고. 그래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암묵적으로 가장 수월한 방법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밖에는 수가 없다고. 본인들도 겪었고, 선배들도 겪어왔고, 후배들도 겪을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과연 그 누가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당당하면 목소리 높여 말하라'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도 쉬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나라고 거기에서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또다시 피해자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라는 말로 어쩔 수 없는 어설픈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나 자신이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들은 꽤나 자주,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와 마주치곤 한다.


아직도 나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 가장 큰 숙제로 다가와 과도한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사소한 내가 무엇을 한다고 세상이 변할까' 싶어 내가 일단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로 덮어 고민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도 한다.


내가 하는 일을 열심히 꾸준히 하면 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 방향과 목적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범죄를 쉽게 생각하는 범죄학자가 되지 않고 싶은, 그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될 것 같아서 종종 정말 난 이러려고 범죄학자의 길을 택한 것일까를 다시 고민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언젠가 나 자신에게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범죄학은, 이런 나에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이전 09화 다가올 범죄를 예방하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