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스위스 #12] 욕심과 불안 사이에서

by 람곰


[작은 욕심을 참아내자]


어제 집에 들어오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을 빨면 하루면 충분히 마르려나? 아니면 조금 참았다가 체르마트 숙소에 가서 세탁을 한 번에 하는게 나을까? 할까 말까 하면 하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만, 그 말을 믿고 결국 어제 옷을 빤 결과 마르지 않은 축축한 옷들만 내 손에 남게 됐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지자 알고 있던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보기로 했다. 에어컨 앞에 빨래를 둬 보기도 하고, 다리미로 다려 보기도 하고, 작은 빨래들은 봉지에 넣어 헤어드라이기 바람을 쐬게 하고… 여유롭게 준비하고 나가자고 다짐했던 하루는, 결국 이 작은 욕심이 불러온 큰 화 덕에 분주한 난리통에 이르고 말았다.


대체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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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작은 욕심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항상 생각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해야할 일을 잊지 못해 몸을 괴롭혀서 어떻게든 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서울에서도 늘 이런 짓을 하며 살았는데, 애인이 늘 나의 안전핀 역할을 해주었기에 티가 나지 않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겨우겨우 깨진 부분에 테이프를 여미며 살아온 바가지인 나는 그리하여 결국 스위스에서 물을 질질 새는 바가지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상에나.


난리통을 부렸는데도 결국 빨래는 마르지 않고, 찝찝한 마음만 남긴 채 젖은 빨래들은 다시 한 곳에 모아 빨래봉지 속으로 밀어넣었다. 결국 이럴거면서, 왜 그렇게 작은 욕심을 참지 못했는지.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작은 고민거리, 하고싶은 것,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급하지 않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모든 일에 우선순위 대신 ‘떠오른 순서’만 매기고 허겁지겁 해내는 데 집중하며 살았던 것 같다. 백리길을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매일 외쳐대며 돌고 돌아 천리만큼 힘들게 가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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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향하는 길,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지금 허겁지겁 살며 잃고 있는건 무엇일까? 또, 앞으로 내가 잃게 될 것들은 무엇일까?


이곳에서의 홀로 생을 되짚어보니 너무 명쾌한 답이 나온다. 한 템포를 늦출 것. 허둥대지 말 것. 내 순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 그간 잊고 살아온 이 ‘기본’들에 다시 충실해질 때다. 왜 이토록 살수록 생은 어려운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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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떨치는 힘]


체르마트에 4박이나 하기로 결정한 데 사실 특별한 생각이 있어던 건 아니었다. 숙소를 정할 때도, 일정을 정할 때도, 여행의 중반 이후이니 느긋하게 천천히 둘러보고 쉬면서 지내다 돌아가야지- 그저 그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작 체르마트에서의 일정이 다가오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스위스 여행 정보 카페를 뒤져봐도, 가이드북을 보아도, 이 곳에서 굳이 숙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체르마트는 그저 산 봉우리 하나를 보기 위해 가는 마을이니, 그 정도의 시간만 쏟아도 충분한 곳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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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체르마트로 향하는 열차 내내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여행의 꽤 오랜 부분을 이곳에 쏟기로 했는데 이렇게 대책없이 오다니, 하는 생각에 괴롭기도 하고, 또 진짜로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어슬렁거리며 지내는 걸 내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게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것인 나에게는, 역시나 느엉나엉 스위스 여행 따위는 맞지 않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 생각을 잠시 멈추로 심호흡을 한 뒤 차분히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반문해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숙박하지 않는 곳이라면 오히려 내가 더 좋아하는 진짜 자유를 찾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산 속의 숙소를 잡았으니 할 일이 없다면 그냥 산을 따라 하이킹이라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체르마트에서 하루에 한가지 정도 일정만 진행하면 나중에 검찰에 기소라도 되는가? 사실 나 스스로 빼고는 아무도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없는데, 대체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렵단 말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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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손에 쥐고 열심히 ‘체르마트 할 것’을 검색하던 핸드폰을 놓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엔 나를 다시 가슴뛰게 하는 수많은 풍경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노란 민들레밭 사이로 흔들리는 바람과 나무들, 그리고 그 뒤에 모든 걸 품은 산, 그리고 산들…. 어쩐지 이 수려한 산세가 두렵고 위협적이기보다는 편안하고 따듯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괜찮다고, 너른 품을 내어주는 엄마의 마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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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도착한 숙소는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물론 중간에 갑자기 불안증상이 강하게 밀려와서 혼자 호흡을 조절 하면서 놀란 맘을 진정시켜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이 내게 생기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 불안은 잊고 이곳 체르마트의 너른 품에 안겨 푹 쉬어야지. 하고 싶은 만큼 걷고, 생각하고, 쉬고, 나아가며, 온전히 내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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