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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2] 욕심과 불안 사이에서


[작은 욕심을 참아내자]


어제 집에 들어오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을 빨면 하루면 충분히 마르려나? 아니면 조금 참았다가 체르마트 숙소에 가서 세탁을 한 번에 하는게 나을까? 할까 말까 하면 하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다만, 그 말을 믿고 결국 어제 옷을 빤 결과 마르지 않은 축축한 옷들만 내 손에 남게 됐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지자 알고 있던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보기로 했다. 에어컨 앞에 빨래를 둬 보기도 하고, 다리미로 다려 보기도 하고, 작은 빨래들은 봉지에 넣어 헤어드라이기 바람을 쐬게 하고… 여유롭게 준비하고 나가자고 다짐했던 하루는, 결국 이 작은 욕심이 불러온 큰 화 덕에 분주한 난리통에 이르고 말았다.


대체 나는 왜 이모양 이꼴인가?



사실 나는 작은 욕심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항상 생각이 몸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 해야할 일을 잊지 못해 몸을 괴롭혀서 어떻게든 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서울에서도 늘 이런 짓을 하며 살았는데, 애인이 늘 나의 안전핀 역할을 해주었기에 티가 나지 않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겨우겨우 깨진 부분에 테이프를 여미며 살아온 바가지인 나는 그리하여 결국 스위스에서 물을 질질 새는 바가지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상에나.


난리통을 부렸는데도 결국 빨래는 마르지 않고, 찝찝한 마음만 남긴 채 젖은 빨래들은 다시 한 곳에 모아 빨래봉지 속으로 밀어넣었다. 결국 이럴거면서, 왜 그렇게 작은 욕심을 참지 못했는지.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작은 고민거리, 하고싶은 것,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급하지 않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모든 일에 우선순위 대신 ‘떠오른 순서’만 매기고 허겁지겁 해내는 데 집중하며 살았던 것 같다. 백리길을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매일 외쳐대며 돌고 돌아 천리만큼 힘들게 가는 인생.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향하는 길,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지금 허겁지겁 살며 잃고 있는건 무엇일까? 또, 앞으로 내가 잃게 될 것들은 무엇일까?


이곳에서의 홀로 생을 되짚어보니 너무 명쾌한 답이 나온다. 한 템포를 늦출 것. 허둥대지 말 것. 내 순서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 그간 잊고 살아온 이 ‘기본’들에 다시 충실해질 때다. 왜 이토록 살수록 생은 어려운것인지.




[불안을 떨치는 힘]


체르마트에 4박이나 하기로 결정한 데 사실 특별한 생각이 있어던 건 아니었다. 숙소를 정할 때도, 일정을 정할 때도, 여행의 중반 이후이니 느긋하게 천천히 둘러보고 쉬면서 지내다 돌아가야지- 그저 그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작 체르마트에서의 일정이 다가오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스위스 여행 정보 카페를 뒤져봐도, 가이드북을 보아도, 이 곳에서 굳이 숙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체르마트는 그저 산 봉우리 하나를 보기 위해 가는 마을이니, 그 정도의 시간만 쏟아도 충분한 곳이라는 것.



그래서였을까. 체르마트로 향하는 열차 내내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여행의 꽤 오랜 부분을 이곳에 쏟기로 했는데 이렇게 대책없이 오다니, 하는 생각에 괴롭기도 하고, 또 진짜로 아무것도 할 게 없어 어슬렁거리며 지내는 걸 내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게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것인 나에게는, 역시나 느엉나엉 스위스 여행 따위는 맞지 않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 생각을 잠시 멈추로 심호흡을 한 뒤 차분히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반문해보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숙박하지 않는 곳이라면 오히려 내가 더 좋아하는 진짜 자유를 찾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산 속의 숙소를 잡았으니 할 일이 없다면 그냥 산을 따라 하이킹이라도 하면 되지 않겠는가. 체르마트에서 하루에 한가지 정도 일정만 진행하면 나중에 검찰에 기소라도 되는가? 사실 나 스스로 빼고는 아무도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없는데, 대체 무엇이 그리 불안하고 두렵단 말이냐고!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손에 쥐고 열심히 ‘체르마트 할 것’을 검색하던 핸드폰을 놓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엔 나를 다시 가슴뛰게 하는 수많은 풍경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노란 민들레밭 사이로 흔들리는 바람과 나무들, 그리고 그 뒤에 모든 걸 품은 산, 그리고 산들…. 어쩐지 이 수려한 산세가 두렵고 위협적이기보다는 편안하고 따듯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괜찮다고, 너른 품을 내어주는 엄마의 마음처럼 말이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도착한 숙소는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물론 중간에 갑자기 불안증상이 강하게 밀려와서 혼자 호흡을 조절 하면서 놀란 맘을 진정시켜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이 내게 생기는 것 같았다. 남은 시간 불안은 잊고 이곳 체르마트의 너른 품에 안겨 푹 쉬어야지. 하고 싶은 만큼 걷고, 생각하고, 쉬고, 나아가며, 온전히 내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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