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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1] 라보 하이킹



스위스에 오기 전, 긴 휴가의 얼마 전쯤엔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끊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었으나 어쩌다보니 약을 먹지 않고 있다가 맞겠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술 마시는 날 안먹다 보니, 일본에 가서 잊고있다보니, 자연스레 약을 먹지 않고 지내게 되었달까. 그래서인지 사실 좀 불안하긴 했다. 물론 약을 들고 있으니 언제든 먹을 순 있지만, 자칫 혼자 있는 시간동안 너무 불안하거나 우울해지진 않을까, 내가 영 미덥지 못했다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스위스에 오기 전, 혼자 스스로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면, 아니, 조금이라도 그 불안과 우울의 씨앗이 고개를 들려고 할 때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바라보고 걸어보자고. 그렇게 할 수 있는만큼 걷다보면 금방 생각의 터널을 지나 또다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였을까. 오늘의 하이킹은 내내 기다려지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여행의 중반이 지나고, 애인이 없는 빈자리가, 보영이가 떠난 빈자리가 유독 휑하게 느껴지던 어젯밤 기억들을 햇볕에 내어 바싹, 말리고 싶었던건지도 모른다. 그 외로움의 씨앗은 언제나 물컹해서, 쨍쨍한 햇살 앞에선 꼼짝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시작된 라보 지역 하이킹. 사실 시골 마을길을 걷는 하이킹이라고 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웬걸, 내리자마자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한 풍경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말았다. 너른 포도밭과 신선한 공기,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레만 호수의 장대한 풍경과, 스위스 어디서나 나를 반기는 만년선을 얹은 알프스의 면면까지…..





어떤 순간을 ‘푸르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날, 이 순간들을 푸르다 말하고 싶었다. 푸른 바람, 푸르른 포도밭, 모든 삶의 근원을 품고 있을 듯한 파란 호수…. 순간은 푸르게 나의 감각들을 깨웠고,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객은 커녕 주민들도 보이지 않는 진한 한낯의 고요와 평온. 나는 어쩌면 오래도록 이 고요와 평온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솔길을 따라 점점 호수에 가까워지면서, 마을과 마을을 지나 또 포도밭을 일구는 이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지나가며 보이는 창문마다에 어린, 집집마다 품은 수많은 인생의 굴곡들을 상상하며, 나는 어쩌면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게 환영받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품어주는 듯 한 묘한 기분. 그래서였을까. 이 길을 끝내고 싶지 않아, 나는 무리한 발을 이끌고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마을 하나를 더 건너 브베까지 오는 길.  체력을 조금 넘치는 구간을 맞이하자 갑자기 미뤄두었던 회사 생각이 밀려왔다. 이 곳에 와서도 놓지 못한 소식들, 그리고 나를 지키고자 한 선택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된 우리 조직원들에 대한 미안함… 수많은 감정들이 지친 내 발걸음 하나하나를 얽매고 붙잡는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멈춰 쉬고 싶지만, 그러면 결국 이 굴레에서 다시 도망치지 못할 것 같아서.



시간은, 기차는, 그리고 내 발은 결국 이겼다. 그 모든 것을 흘러 지친 몸으로 호텔에 도착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의 내 삶에 붙은 많은 무거운 생각의 가지들이, 내 걸음과 햇살 하나하나에 차분히 녹아 없어지리라는 것을.


지치고 힘들 때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


내 걸음 하나하나에 어려있던, 푸르름과, 햇살과, 그리고 나 자신의 흔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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