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스위스 #13]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by 람곰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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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후부터 비소식이 있었다. 그래서 늑장을 부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세상에 비가 오겠다던 하늘이 너무 맑은 것 아닌가? 오전부터 흐리면 숙소에서 누워서 책이나 보고 쉬려고 했는데, 이렇게 날이 밝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않는가! 그래서 우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케이블카를 타고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로 향했다.


해발 4000m가 넘는다는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는, 5월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알프스 산맥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세상에 5월에 흰눈도 아니고 5월의 스키라니! 진작 스키라도 배워둘껄 하고 아쉬워하다, 배웠다고 내가 탔겠냐는 자문에 그럴리가… 라는 답이 내려지고서야 편한 맘으로 경치 구경이나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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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느 알프스의 산맥과 비슷했지만, 융프라우나 피르스트에 비해 더 가까이 빙하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떨어질 듯 가까운 곳에 보이는 빙하들, 이 빙하들이 조금씩 녹아 흐르는 일이 벌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너번의 케이블카를 갈아타고서야 도착한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비 예보가 무색하게 맑은 하늘 덕에 널리 보이는 알프스의 설산들을 눈으로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투명한 햇살 아래도 녹지 않고 영영 하얗게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 같던, 눈, 그리고 저 너머의 모든 눈더미들… 마치 내 삶의 모든 것도 이렇게 녹지 않고 영영 기억되었으면 하는 맘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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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이 능선을 넘으면 이탈리아의 산맥이라니. 스위스의 산을 오르니 이탈리아가 나타나는 게, 반도에 갇혀 사는 나로서는 늘 생경한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경계가 이토록 투명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른 정상. 새파란 설경 위에 마치 모든 아픔은 내가 품을터이니 이 곳에 모두 두고 가라 말하는 듯 한 십자가 상까지… 춥고 시린 설산의 차가움을 예상했지만, 정상에서 받은 느낌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 곳의 장엄한 설산 아래 내 모든 걱정과 아픔을 묻어도 괜찮다는 듯, 햇살은 영영 잊히지 않을 정도로 따갑게 나를 비췄다. 눈이 시리다-는 말은 정말 이 풍경에 꼭 맞도록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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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차가운 설산에게 뜨겁게 안긴 후,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인간사의 사소한 마음다툼들은 다 이곳에 묻어버리고, 훌훌 털어 새 삶을 시작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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