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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n 17. 2023

[순간의, 스위스 #13]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오늘은 오후부터 비소식이 있었다. 그래서 늑장을 부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세상에 비가 오겠다던 하늘이 너무 맑은 것 아닌가? 오전부터 흐리면 숙소에서 누워서 책이나 보고 쉬려고 했는데, 이렇게 날이 밝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않는가! 그래서 우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케이블카를 타고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로 향했다.


 해발 4000m가 넘는다는 글래시어 파라다이스는, 5월에도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알프스 산맥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세상에 5월에 흰눈도 아니고 5월의 스키라니! 진작 스키라도 배워둘껄 하고 아쉬워하다, 배웠다고 내가 탔겠냐는 자문에 그럴리가… 라는 답이 내려지고서야 편한 맘으로 경치 구경이나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느 알프스의 산맥과 비슷했지만, 융프라우나 피르스트에 비해 더 가까이 빙하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떨어질 듯 가까운 곳에 보이는 빙하들, 이 빙하들이 조금씩 녹아 흐르는 일이 벌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서너번의 케이블카를 갈아타고서야 도착한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비 예보가 무색하게 맑은 하늘 덕에 널리 보이는 알프스의 설산들을 눈으로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 투명한 햇살 아래도 녹지 않고 영영 하얗게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 같던, 눈, 그리고 저 너머의 모든 눈더미들… 마치 내 삶의 모든 것도 이렇게 녹지 않고 영영 기억되었으면 하는 맘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이 능선을 넘으면 이탈리아의 산맥이라니. 스위스의 산을 오르니 이탈리아가 나타나는 게, 반도에 갇혀 사는 나로서는 늘 생경한 느낌이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의 경계가 이토록 투명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른 정상. 새파란 설경 위에 마치 모든 아픔은 내가 품을터이니 이 곳에 모두 두고 가라 말하는 듯 한 십자가 상까지… 춥고 시린 설산의 차가움을 예상했지만, 정상에서 받은 느낌은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 곳의 장엄한 설산 아래 내 모든 걱정과 아픔을 묻어도 괜찮다는 듯, 햇살은 영영 잊히지 않을 정도로 따갑게 나를 비췄다. 눈이 시리다-는 말은 정말 이 풍경에 꼭 맞도록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차가운 설산에게 뜨겁게 안긴 후, 나는 다시 길을 나선다. 인간사의 사소한 마음다툼들은 다 이곳에 묻어버리고, 훌훌 털어 새 삶을 시작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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