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점
알프스에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이미 다녀온 선배가 남긴 인상 깊은 말이 하나 있다.
“스위스에서는 뷰가 가장 좋은 곳에 놀이터가 있어. 한국 같으면 리조트를 지을 텐데.”
수네가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놀이터가 있다고 했다. 선배의 말을 눈으로 확인할 때가 왔다. 그러나 급할 건 없다. 먼저 시내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심심해 2호는 드디어 자신의 얼굴에도 맞고 취향에도 꼭 맞는 선글라스를 찾았다! 기쁨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푸니쿨라를 타고 수네가에 도착했다. 아래편에 보이는 라이네 호수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마터호른이 한눈에 보였다. 피부를 간지럽히는 바람과 눈앞에 일렁이는 들꽃에 마음이 또 설레었다. 풍경이 아무리 좋아도 닫힌 곤돌라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걸으면서 오감으로 경험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라이네 호수는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였다. 호수 옆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놀이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그재그 나무 물길로 물이 졸졸 흘렀다. 물레방아도 있었다. 내 마음에 쏙 들었고, 아이들에게도 그런 것 같았다. 이제 형제는 우리를 찾지 않았다. 처음에는 놀이터에서 한참을 놀았다. 다음에는 호숫가에 가서 뗏목을 탔다. 다시 돌아와 놀이터에서 노는가 싶더니 호수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발을 적시며 재밌게 노는가 싶더니 이제 물고기를 잡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들은 땡볕에서 4시간 이상 성실히 놀았다. 특히 1호는 얼굴을 까맣게 태웠다.
아이들이 즐거우니 우리 부부도 편안했다. 남편은 그늘막 아래에서 짧은 낮잠을 잤다. 나는 호수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들꽃에 감탄해서 사진을 한참 찍었다. 러스킨이 왜 그림을 그렸는지 알겠다. 사진만 한 게 없지만, 그럼에도 사진은 부족하다. 사각 틀 안의 풍경은 물질감이 없다. 마터호른이 내 눈앞에서는 큰데 사진 속에서는 개미만 하다. 내 뇌가 시각정보를 왜곡시킨 것이겠지만.
나는 마터호른 방향으로 난 작고 귀여운 언덕을 혼자 넘어보기로 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사람들의 웅성임이 사라지고 나 혼자 마터호른을 마주하게 되었다. 발치에는 들꽃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순간이 왔다. 자연과 내가 고요히 1대 1로 마주하는 순간, 가슴 두근거리는 감동이 밀려드는 순간, 이것이 워즈워스가 말했던 ‘시간의 점’ 일 것이다. 앞으로 두고두고 이 순간을 떠올릴 것임을 예감했다. 그러나 충만감을 오래 누리기에는 나는 생각도 겁도 많았다. 남편이나 심심해 형제가 나를 찾지 않을까? 혼자 더 걸어 나갔다가 길을 잃지 않을까? 나는 되돌아오고 말았다. 형제는 잘 놀고 있었다. 남편에게 청했다.
“나 멋진 곳 다녀왔는데 같이 한 번 가볼래?”
다시 가서 보니, 아까와 달리 평범한 풍경이었다. 꿈에서 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