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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r 09. 2024

독거선생



혼자 살고 있다. 저녁에 약속이 있을 때도 있긴 하지만 가끔이다. 혼자 밥 해 먹고 치우고 청소하고 잔다. 꽤 평화롭다. 그런데 가끔 정말 별 일은 아닌데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때가 있지 않은가. 아침에 서두르다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 찧은 이야기, 꿈에서 뜬금없이 이름도 기억 안나는 초등학교 동창이 나온 이야기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본가에서 지낼 땐 다른 방으로 달려가서 가족들에게 짹짹댔지만 지금은 이런 걸로 엄마나 동생에게 전화하기엔 심히 소소한 느낌이다. 머리 말리고 나갈 준비를 하다 보면 금세 잊히는 가벼운 이야기들이니까. 그러다 보면 내 작고 소중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훠이훠이 휘발되어 버릴 때가 많다.

​​


그래서 혼자 사는 독거 선생은 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아침 조회 시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 어제 샤워하고 추워서 보일러 온도를 27도로 해놨거든? 근데 침대에 누워있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났더니 방이 후끈후끈 장난 아니었어. 아 이번 달에 난방비 어떡하지…”

“앗싸 샘 난방비 폭탄~~”


“헐, 샘이 에너지 아끼라면서요!”

​​


아주 전혀 ~ 위로가 안 되는 반응들이 많지만 나는 다음날도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꿋꿋하게 한다.

​​


“대박뉴스 알려줄까? 샘 고등학교 동창이 이번 주에 나는 솔로 나온데!”​


“나는 솔로가 뭐예요?”


“헐! 저 엄마랑 그거 보는데! 친구 이름이 뭐예요?”


(안 알려준다고 했더니) ”아까비~ 샘 나이 알아낼 수 있었는데. “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샘 이번에 아버지 타시던 차 물려받기로 했다!!”

“올~ 차 뭔데요?”


“샘 차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응 없었어. 소나타 오래된 거야 한 15년 됐을걸?”


“멈추면 어떡해요? “


“뭐 어때. 차 생긴 게 어디야!! 사진 보여줄까? “


“네!! 보여주세요!!”


점점 아이들이 내 얘기를 들어준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 사는 선생님의 푸념을 아이들은 강제로 앉아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여운 것들!

애들이 내 얘기를 얼마나 깊게 듣겠냐마는 그래도 눈이 똥그래져서 아무 말이나 한마디씩 하는 게 귀엽다. 내가 하는 말에 솔직하고 밝은 기운으로 맞받아 쳐주는 게 좋다. 심각해지지도,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혼자 축축하게 안고 있던 문제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나면 보송보송해진다. 한결 가벼워진다. 어쩌면 나는 어린이의 기운을 빨아먹고사는 독거 선생이자 마녀일지도 모르겠다.

​​


회사를 그만두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선생님이 되었다. 진로를 바꿀 때 아동 교육과 노인 복지에 둘 다 관심이 갔었다. 앞으로의 전망은 노인복지 분야가 훨씬 좋을 것 같았지만 결국 수능을 다시 쳐서 교육대학교 4년을 다니는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했다. 회사 생활에 지쳤던 내겐 아이들의 기운을 빌려 힘을 내고 싶다는 속셈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교사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크지만 난 자주 웃는다. 애들이 내게 와서 반복하는 아재개그가 어이없어서 웃고, 함께 급식을 3-4번씩 더 타먹으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한다. 과학 시간에 사람한테 뼈가 없으면 어떨까 표현해 보라고 했더니 바닥에 문어처럼 붙어서 혀까지 축 늘어뜨리는 게 우스꽝스러워서 미소 짓는다.



아이들에게 큰 걸 바라지 않는다. 나를 오래 기억해 주길 바라지도 않고, 칭송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도 무탈하게, 누구 하나 마음 크게 다치지 않고 지내면 좋겠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면서.​


  아이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많다. 아침에 서두르다 계란프라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징징대고 싶다. 마트 앞에 새로 등장한 트럭에서 파는 통닭을 사 먹었는데 너무 크기가 작아서 화가 났다고 하소연하고 싶다. 학교 앞 편의점에 갔는데 운 좋게도 먹태깡을 득템 했다는 자랑도 실컷~ 쭉~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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