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요새 학교에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그래? 다행이다 성민아~ 학교가 재밌나 보다."
"네. 삼 학년 때보다 빨라요. 아빠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민이가 눈은 살짝 풀리고 입을 살짝 벌리며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성민이가 반에 금방 적응을 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또, 학기 초의 반 분위기가 괜찮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피곤한 하루 끝에 비타민 주사를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굵고 짧게 활력이 돋았다.
사 학년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말도 잘 통하고 때론 친구 같기도 한 육 학년 담임 생활은 즐거웠지만 버거웠다. 졸업사진, 졸업 여행, 졸업식, 중학교 배정 업무가 연이어 밀려드는 빡빡한 일 년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면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며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 육 학년 담임만 두 번 하다가 사 학년으로 내려오면서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칼퇴를 하고 싶었다. 주말엔 다음 주 수업 준비 안 하고 쉬고 싶었다. 육 학년 아이들과 지낼 때처럼 창업 동아리도 하고 붕어빵도 구워 먹으며 얻는 재미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사 학년 아이들을 처음 만난 월요일, 담임 선생님에게 궁금한 점을 색종이에 적어 비행기를 만들어서 앞으로 날려달라고 했다. 선생님 소개 자료를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귀찮아서) 써본 방법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색종이 색을 고르는 것부터 진심인 데다가, 비행기를 접는 것도, 나에게 날리는 것도 너무 즐거워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MBTI가 뭐예요?'
'좋아하는 동물은 뭐예요?'
질문도 젤리처럼 말랑말랑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을 적은 아이가 일곱 명은 되었다. 오래 생각 안 하고 가볍게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다. 선생님이 곤란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청정구역일 줄이야. 육 학년과 같은 활동을 했으면 "궁금한 것 없으면 어떻게 해요?", "첫사랑 이야기 해주시면 안 돼요?"라며 시큰둥하게, 또는 짓궂게 굴었을 것이 눈앞에 선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달걀부침이고 자주 쉽게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성준이가 손을 번쩍 들고는 달걀부침을 맛있게 먹는 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있잖아요. 달걀 프라이 할 때 소금 뿌리잖아요. 그걸 중간에 뿌리지 말고 맨 마지막에 뿌리면 훨씬 맛있어요. 유튜브에 나와서 제가 해봤어요."
그 방법은 몰랐다고, 벌써 달걀 프라이를 혼자 해 먹을 수 있냐고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줬더니 성준이 어깨가 금방 으쓱해지는 게 보였다. 좋아하는 동물이 쿼카라고 했더니 자기 가방에 달린 쿼카 인형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반가움을 표시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고양이는 안 좋아하냐며 시무룩해진 아이도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장수풍뎅이 사진을 보여주며 장수풍뎅이는 어떻냐고 내게 영업을 하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 후로도 거의 매일 '풍이'(장수풍뎅이의 이름)의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지난주 급식시간에는 치킨너겟과 머스터드소스가 듬뿍 발린 샐러드가 같이 나왔다. 샐러드를 좋아해서 듬뿍 받아 소처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진서가 그게 그렇게 맛있냐고 묻더니 평소에 먹지 않는다는 샐러드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샐러드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냐며 옆에 있는 친구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야, 이거 샐러드 엄청 맛있어. 선생님은 나보다 세 배만큼 받았는데 다 드셨어! 너도 하나만 먹어봐." '옴마나' 싶었다. 조용한 관종인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기쁘기도 하고 앞으로 건강한 반찬이 나오면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나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육 학년과 급식을 먹을 땐 잘 못 먹는 표고버섯이나 두릅 반찬이 나올 때 거리낌 없이 젓가락도 안 댈 수 있었는데 말이다.
꼴랑 한 달 정도를 같이 보냈을 뿐이라 조심스럽지만, 아직은 예쁜 모습만 보일 때라지만, 열한 살은 열세 살보다 많이 귀엽다. 그리고 나는 귀여운 것에 약하기 때문에 조만간 이 아이들에게 홀랑 넘어가지 않을까 싶다. 육 학년이랑 지낼 땐 친구 같은 편안함이 나랑 맞는 것 같았는데 사 학년과 지내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벌써 든다. 내년엔 좀 더 용기를 내어 이학년으로 내려가 볼까 하는 설레발도 치고 있다. 사진첩을 자꾸 열어 오늘 찍은 아이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본다. 카메라를 가져다 대기만 하면 서로 찍어달라고 방방 튀어 오르는 모습이 아직도 낯설다. 낯선데 귀엽다.
이제 삼 년 차밖에 안 됐는데 벌써 지치고 무기력해지나 싶어서 잔뜩 걱정하며 맞이한 새 학기였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내 앞에서 개다리춤을 추는 귀요미들과 함께라면 그런 걱정 따위 바로 개나 줘버려도 되지 않을까? 올봄에 나, 다시 설레도 되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