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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r 02. 2024

내로남불


내가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마~ 베이붸'


2010년 발표된 화제의 내로남불 곡의 가사이다. 아니 이게 무슨 상놈의 소린가 싶다가도 지금까지 회자가 되는 걸 보면 성공한 곡인가 싶다.


아이들한테 하지 말라면서 정작 교사 본인도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꽤 많다. 아니, 아~주 많다. 목록을 뽑아보자면 A4용지 한 장에 빼곡히 써도 모자라다. 자기도 못 지키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내로남불 선생일 때가 많은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자기 전에 핸드폰 하지 말고 일찍 잠들기

> 본인도 핸드폰 감금 상자를 사야 하나 고민 중


2. 친구에게 서운한 것이 있으면 말로 바로 표현하기

> 본인도 말로 잘 못하고 꽁하거나 혼자 망상에 빠진다


3. 남의 물건을 사용할 땐 꼭 먼저 허락을 구하기

> 오늘도 동생옷 몰래 입고 나갔다가 걸렸다


4. 자기 주변을 스스로 정돈하는 습관 들이기'

> 책상 위의 먼지부터 닦으시지


5.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 맨날 햇반 하나씩 까먹음



내로남불 목록 중에서도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 군것질하지 말라고 하면서 선생님은 몰래 간식을 까먹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교사의 눈을 피해 마이쮸를 나눠 먹으며 우정을 확인하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마스크 속에 초콜릿을 넣고 오물거리다가 개코 선생님에게 압수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인 코딱지 묻은 간식들은 하교할 때 돌려주는데 여러 번 걸리면 퀴즈 상품으로 써버리기도 한다. 우리 학교는 급식실이 좁아서 오후 1시가 되어서야 6학년이 밥 먹을 차례가 된다. 성장기의 아이들이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어도 배가 고플 시간인데 문제는 아침을 거르고 오는 학생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바쁘신 경우도 있고 아침 먹는 습관이 안 들어서 그렇기도 하다. 얼마나 배가 고플까 싶어 가끔 땀 흘린 체육시간 후엔 강냉이를 한 줌 씩 나누어준다. 그 순간만큼은 강냉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가 된다. 많이 달라고 애교 부리고 강냉이 한 알 가지고 서로 투닥투닥하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교실에서 간식 먹는 걸 공식적으로 허용하면 교실이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먹을 것 가지고 하는 싸움이 시작된다. ‘누구는 주고 나는 왜 안 주냐, 나는 지난번에 줬는데 너는 나를 왜 안 챙겨주냐’하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교사는 공식적으로 간식 금지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놓고 나는 쉬는 시간에 수상할 만큼 교사 연구실을 자주 드나든다.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면 아이들 오기 전에 연구실 냉장고에 귤, 찐 고구마 등을 쟁여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 식사를 든든히 먹은 날이라면 3교시까지 버티기도 하지만 대부분 2교시가 끝나면 몰려드는 허기를 못 이겨 홀린 듯이 연구실 냉장고로 달려간다.


 쉬는 시간은 10분인데 이전 수업 마무리나 다음 수업 준비로 바쁠 때가 많아서 1분 1초를 아껴 써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아이들이 다가와 좋아하는 아이돌 컴백 소식을 전하거나 새로 산 인형 고리를 자랑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기 쉽다.


 당장 기 빨린 몸뚱어리에 당충전 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래야 아이들 얘기를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생기 든 말든 하겠는데 어쩌겠나. 가끔 허기진 상태로 수업을 계속하다 보면 손끝이 덜덜 떨릴 때도 있다.


교사 연구실은 원래 같은 학년 교사들의 휴식, 회의 공간이기도 하고 학생 개별 상담이필요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상담을 하려면 연구실에 남교사와 여학생, 여교사와 남학생이 단 둘이 있어야 하는 때도 있기 때문에 창문은 안이 보이도록 투명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눈을 피해 간식을 먹으려면 의자를 출입문 벽 쪽에 바짝 붙여놓고 사각지대를 이용해야 한다. 사각지대에 앉아 창문 밖을 힐끔거리며 조마조마하게 귤을 까먹고 있을 때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어떤 선생님들은 아침에 해장을 못했다면서 당당하게 냄새가 풀풀 나는 컵라면을 먹기도 한다. 나만 너무 애들 눈치를 보나 싶지만 지나가는 애들이랑 눈이 마주치면 안 민망할 자신도 없고 먹고 싶다는 애들 다 사줄 자신도 없는데 어쩌겠나. 소심한 선생님은 벽에 등을 붙이고 간식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다.


 몰래 먹는 간식의 종류는 점점 다양해진다. 처음엔 낱개 포장되어 있는 과자를 하나씩 뜯어먹는 수준이었는데 그 과자가 모여 뱃살을 증식시키는 바람에 여러 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여름에는 포도나 방울토마토를 잔뜩 씻어다 놓고 겨울에는 찐 고구마랑 귤을 넉넉하게 준비해 놓는다. 아몬드는 실온 보관이 가능해서 교실 서랍에 넣고 아이들을 하교시키자마자 한 줌씩 씹어먹으며 한숨을 돌린다. 아이들이 내게 다람쥐를 닮았다고 하는데 몰래 아몬드 씹어 먹는 걸 어떻게 알고 그랬나 싶다.


  성적 처리 기간이나 학부모 상담기간 등 스트레스가 확 몰려오는 때면 뭐니 뭐니 해도 초콜릿이나 젤리를 잔뜩 입속에 털어 넣어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건강한 간식 따위는 시시해지는 때다.


  좀 더 짬이 차면 연구실에서 당당하게 간식을 즐기는 날이 올까? 나 어릴 땐 선생님들은 어떻게 지내셨던 걸까? 내가 간식을 많이 먹는 편인가? 나의 선생님들도 벽에 붙어서 몰래 드셨던 걸까? 눈치가 빠른 어린이였던 나도 선생님이 몰래 숨어 간식을 먹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은 못했다. 하긴 내가 선생님이 될 줄도 몰랐다.



올해는 연구실 좀 덜 드나들게 텀블러에 몰래 미숫가루나 선식을 타서 들고 가볼까? 좀 더 맘 편히 허기를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텀블러 뚜껑을 열면 바로 고소한 냄새가 풍겨서 티가 나려나? 소심한 선생님은 3월 개학을 앞두고 이런 고민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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