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육학년 팁 없어요? 저 육학년 담임 처음이라 너무 걱정돼요….”
두해 동안 큰 사건 없이 육학년 담임을 무사히 마치고 나는 어엿한 경력직이 되었다. 칼부림이 난다던가, 죽고싶다는 말을 반복한다던가, 임신을 한다올해 ‘탈 육학년’에 성공하고 사학년으로 대피했다. 사학년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사춘기는 덜 온 꿀학년이라고 들었다. 드디어 내게도 아침 시간에 커피 한 잔 내려 마실 여유가 생기는 걸까! 육학년 담임을 연속으로 하면서 학년 선택 점수가 꽤 쌓인 덕이니 지난날의 나에게 고마울 일이다.
경력직이긴 해도 이제 처음 육학년을 맡는 동료 선생님이 묘책을 묻는다면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보통 강조하는 학기초 기선제압 같은 건 치밀하게 계획해 본 적이 없다. 어설픈 센 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 필명인 람티는 아이들이 지어준 것인데 다람쥐의 ‘람’과 티쳐의 ‘티’가 만난 것이다. 아이들이 내게 다람쥐 같다고 하는 말에는 외모도 관련이 있겠지만 내 멍한 표정과 늘 뭘 깜빡해서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모습이 한 몫 했을 것이이. 기선제압이라던가 차분한 교실분위기 만드는 법에 대해서 내가 동료들에게 조언을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도움이 될만한 자료가 있을까 싶어 찾다가 덕분에 작년 학기 초의 수업 자료와 사진들을 돌아봤다. 이런 것도 했었나 싶고 서로 어색했던 삼월 첫날이 떠올랐다. 특히 첫날 찍은 우리 반 단체사진에서 윤희의 굳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졸업사진 촬영 때 우리 반 미소왕이 되었던 윤희가 학기 초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샘은 왜 자리가 이렇게 깨끗해요? 작년 선배들이 준 편지 같은 거 없어요?”
“우리 반은 놀이 안 해요? 작년에 호준샘은 맨날 놀이했는데.”
윤희는 3월 첫 주 내내 나를 떠보는 듯했다. 내가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는지 확인하려 하고 작년 선생님과 나를 비교하는 말을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변 친구들도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서 바로 뭐라고 맞받아치지 못했다. 괜히 발끈하고 후회하기는 싫었다. 속좁아 보이기도 싫었다. 띵한 상태에서 어떻게 반격을 해야 야무질까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 자꾸 작년 선생님 반을 기웃거리는 윤희의 모습도 못 본 척해야 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윤희에게 능글맞은 농담을 던지며 아무렇지 않은 척할 그릇이 못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윤희가 진짜 나빴다. 연인 관계에서 제일 피할 것 중 하나가 전 애인이랑 비교하는 거라던데 이게 그거 아니냐고! 썸타는 사이에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거 아니냐고!
괜히 작년 애들 사진을 찾아봤다. 내 자리 옆에 꼭 붙어서 재잘거리던 친숙한 얼굴들이 그리웠다. 등굣길에 옆 중학교 학생들을 보면 작년 내 새끼들 없나 아련하게 살폈다.
그렇게 꿍하게 일주일을 보냈다. 결국 그냥 안 넘어가져서 금요일 종례시간에 한 마디 해보기로 작정했다. 서운한 마음을 터놓기엔 아직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들이랑 삼겹살에 소맥 한잔하고 속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난 지 1주일, 맨 정신에 25명을 앞에 앉혀두고 속상한 마음을 얘기하는 건 초보 교사에게 작정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우리 반 좋아. 같이 일주일 보내보니까 좀 시끌벅적해도 본래 마음은 선할 것 같아. 선생님은 그렇게 믿고 1년 같이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할 거야. 근데 이번 주에 좀 속상한 말을 들었다?”
“헉, 뭔데요?“
“아직 작년 선생님 그리운 마음 충분히 남아있을 수 있지. 우리가 알게 된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근데 선생님 앞에서 대놓고 비교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내가 콕 집어내지 않아도 자기가 알지? 너희 만나는 첫 주라 나도 긴장하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좀 속상하고 힘 빠졌어.”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는 표정이 대부분이었고 몇 명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윤희도 그중 하나였다.
“ 나도 너희 선배들 보고 싶을 때 있지. 그래도 티는 안 내려고해. 그게 배려라고 생각하는 거야. 상대방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보는 거. 올해 어쨌든 우리 잘 지내봐야 하잖아? 너희 속마음이 어떻든 최소한의 배려는 받고 싶어. 해 줄 수 있지?”
한 손에 쥔 손수건이 땀으로 흥건해졌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그날 이후 아이들은 다른 반과 대놓고 비교하는 걸 멈춘 듯했고 나도 곪기 전에 상처를 터뜨렸는지 금세 아물어갔다. 분주한 3월 일정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틈틈이 우스갯소리도 하고 일대일 상담도 하며 조금씩 아이들과 가까워지던 날들이었다.
“샘, 오늘도 급식실 끝자리에 앉아서 드실 거죠?”
윤희였다. 내가 서운함을 드러낸 이후 줄곧 눈치를 보던 윤희는 언제부턴가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응 그렇지? 왜에?”
“그럼 저 급식줄 끝에 서려고요.”
“오잉? 샘 옆자리 앉으려고?”
“네.”
이건 뭐지 싶으면서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급식실 저 편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호준샘(작년 윤희 담임선생님)을 바라봤다.
‘샘 보고 있어요? 윤희가 이제 제가 좋답니다. 으하하하!’
호준샘이 이런 속사정을 알리가 있나. 그렇지만 나는 묘하게 이긴 기분이었다. 유치빤스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어떤 모습이 한 달 동안 윤희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당시엔 직접 물어보기가 멋쩍었고 나중엔 물어봐야지 하고 깜빡했다.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는 걸 잊을 정도로 윤희는 애반심(?)이 투철한 아이가 되었으니까. 우리 반이 제일 좋다고 다른 반에 떠들고 다니는 아이가 되었으니까. 내가 급식실에 물통을 놓고 오는 날이면 잊지 않고 챙겨주는 일등 보좌관이 되었으니까. 윤희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4월이 채 지나지 않아 추억거리가 되었다.
어쩌면 꼼꼼하고 야무진 윤희는 내가 덜렁거려서 챙겨주는 재미를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윤희는 일단 시작하면 온마음을 주기 때문에 썸 타는 기간이 충분히 필요한 아이였던거 아닐까? 올해 중학교에 가서도 선생님 옆자리를 사수하려나? 뭐 잠깐 샘이 나겠지만 윤희가 금방 적응했다는 뜻일테니 기쁘게 옆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6학년을 처음 맡는 동료샘들에게 해 줄 말이 생각났다. 아이들도 6학년이 처음이라고. 선생님이 그런 것처럼 아이들도 긴장하고 간 보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썸 타는 3월에 살살 보듬어주면 금세 선생님의 제일 든든한 편이 되어줄 수도 있다고 윤희 이야기를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