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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r 13. 2024

조상님이세요?



"너네 그거 알아? 나 이 학교 나왔어."

"네에에에? 선생님이 선배님이라고요? 언제 다녔는데요?"

"졸업한 지 십년도 훠얼씬 넘었지~ 아무튼 오래됐어. 라떼는 저 체육관도 없었어. 더워도 운동장 그냥 놀았지."

"급식실은 있었어요?"

"아니? 교실에서 먹었지. 반 마다 카트에 밥이랑 반찬 올려주시면 돌아가면서 급식 당번하고 그랬어."

"헐 대박, 완전 조상님 만난 것 같아요."

 조상님이라는 단어의 등장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싶었다. 임용 합격 후 발령 대기 기간에 시간강사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용돈 벌이를 했다. 발령때까지 놀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했다. 삼개월짜리 영어과목 전담 교사로 일하기도 하고 병가를 쓴 선생님 대신 하루짜리 담임교사로 지내기도 했다. 동네에 따라, 학교에 따라 아이들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구경하듯이 여러 학교를 전전하던 때였다.


'여기 내 모교인데 공고 올라왔네. 삼일짜리 육학년 담임 시간강사? 재밌겠는데! 집도 가깝고.'

 산 중턱에 있는 나의 모교를 졸업 후에 찾아간 적은 동생 졸업식이 마지막이었다. 시간강사 지원 서류를 내려고 다시 찾은 그곳은 소름 돋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닐 때 교장선생님께서 중앙 계단을 옆을 따라 만들어 놓으신 미끄럼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급식실에서 나는 특유의 콤콤한 냄새도, 그 앞에 이어진 구름다리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운동장 한 켠에 번쩍번쩍한 체육관이 들어선 정도였다.

 학교 다닐 때 교장 선생님 성함에 봉... 자가 들어있던 것만 기억이 난다. 봉교장선생님은 매일 아침 빨간 카라셔츠와 청록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운동장 달리기에 앞장서셨다. 학생들도 교장 선생님과 같이 뛰거나 걷는 게 아침 문화처럼 자리 잡았다. 운동장을 돈 바퀴수를 통장에 쌓아서 달마다 많이 참여한 학생에게 상장을 주었다. 나도 상장을 받고 싶어서 꽤 열심히 운동장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그땐 몰랐는데 선생님이 되어 돌아보니 빨간 티셔츠 색깔 만큼이나 열정적인 교장선생님이셨구나 싶었다. 초등학생 때 나는 꿈이 매 년 바뀌는 욕심많은 아이었다. 신문 기자, 변호사, 외교관 등 주로 똑부러지는 직업을 탐냈는데 그 목록에 초등학교 선생님은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엄청 닮고 싶었다거나 즐거워보이는 선생님을 만났던 기억이 없다. 그랬던 내가 어쩌다 교직에 발을 들였을까? 또 한 번 의아해지면서 인생은 모를 일이다 싶었다.

 추억 여행을 온 것처럼 학교를 구경하다가 교무실을 찾아 들어갔다. 연예인이 모교에 찾아가 선생님도 찾고 성적표도 들추어보고 하던데 이런 기분일까. 보통 사람들은 졸업한 초등학교의 교무실에 어른이 되어 다시 들어가 볼 일이 없을텐데 말이다. 시간강사 근무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면서 교감 선생님께 내가 이 학교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말할까 말까 입이 근질근질했다. 말하면 반가워하시겠지만 굳이 또 말해서 뭐하겠나 하며 고민을 하는 사이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근무와 관련해서 필요한 얘기만 하다가 나왔고 일주일 뒤에 맡기로 한 육학년 교실을 찾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육학년 누나형아들 교실은 후관 맨 윗층 후미진 곳에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제일 다리가 긴 학년이니 어쩔 수 없이 희생해라 이런 논리일 것이다. 육학년 교실이 가장 올라가기 힘든 곳에 있는 것과 육학년이 되면 부쩍 입에 욕을 담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 사이에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담임 시간강사는 처음이고 또 육학년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상태라 그런지 계단을 오르는 내 입에서도 험한 말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행히 학교 조상님, 아니 선배라고 소개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너무 신기하다면서 옛날에 학교가 어땠는지 이 것 저 것 묻고 집에가서 부모님한테 자랑할 거라고 했다. 귀여운 후배님들이었다. 분수의 곱셈을 설명하다가 어버버 하기도 하고, 처음 써보는 전자 칠판이 익숙하지 않아서 여러 번 애를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나를 기다려주고 도와줘서 고마웠다. 선배님 찬스였을까? 아이들과 있을 땐 일 분 일 초도 정신이 없었지만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교정을 쓱 한 바퀴 돌다가 퇴근할 때면 잊고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이 스멀스멀 났다.


 일학년 때 선생님이 가지고 다니시던 고추장 주걱매를 보며 잔뜩 겁이 났었다. 삼학년부터는 식물 관찰일기나 독후감이랑 꽤 열심히 이것저것 적었던 것 같다. 학년 체육대회 때 운동장에서 수박을 옮긴다고 뛰어다니다가 친구들이 스탠드에 앉아 다 쳐다보는 앞에서 꽈당 넘어졌었다. 무릎에 난 상처는 고등학교 때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깊었는데 그보다 쪽팔림이 더 깊고 생생했다.


 오랜만에 길어 올린 기억의 샘물에서는 여러 가지 맛이 났다. 달콤하지만은 않지만 다시 맛보기 싫은 텁텁한 맛도 다행히 아니었다. 전에 설악산의 유명한 약수터에 가서 물맛을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이 오색 약수터였던가? 초딩 시절로부터 길어 올린 샘물에선 오색을 훌쩍 넘어 오십 색의 맛도 날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아이들 앞에서 조잘조잘대고 있자니 옛날 옛적 얘기를 전해주는 푸근한 할머니가 된 것 같았다. 하긴 모교에 선생님으로 다시 일해보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런 선생님을 만날 아이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나를 만난 것도 아이들에겐 초등학교 시절의 색다른 추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후배라고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마음이 더 가고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었다. 체육 수업이 있는 날엔 일리터짜리 얼음물을 얼려가느라 낑낑대며 출근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한 명 한 명 이름을 외워보려고 퇴근 후에도 영어 단어 외우듯 애도 써보았다. 원래 담임 선생님이 병가를 연장해야 될 수도 있다고 하셔서 잠깐 기대를 했지만 아쉽게도 근무 연장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선물 같으셨어요.'

 마지막 날 아이가 적어 준 편지에 쓰여 있는 말이 내겐 선물 같았다. 재수 끝에 힘들게 임용고시에 합격하고도 이게 맞는 길인지, 내가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던 때였다. 모교에서 일하며 추억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응원의 마음도 받았다. 수고했다고, 괜찮을거라고 후배들이 작은 손을 모아 어깨를 토닥토닥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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