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기 초록색 후드티 입은 애가 재훈이 여자친구예요."
급식에 데리야키 닭 날개 구이가 나와서 신나게 뜯고 맛보던 때였다. 사 학년 아이들은 좀처럼 내가 식사에 취해 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먹다 지칠 만큼 건더기가 푸짐한 한우 설렁탕도 나오고, 바삭한 에그타르트도 등장하는 우리 학교 급식이란 말이다. 일인 가구에게는 마땅히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넘겨야 하는 귀한 한 끼다. 그런데 아이들은 된장국 국물에 사과가 빠져서 못 먹게 되었다는 것도, 자기가 받은 샤인머스캣 알알이 친구 것보다 훨씬 크고 싱싱하다는 것도 굳이 와서 보고한다. 밥이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도 남의 연애 소식은 언제나 흥미로우니 입 주변에 갈색 소스를 묻힌 채로 열심히 대꾸해 본다.
"오~ 진짜? 저 머리 높게 묶은 친구 말하는 거지?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새침한 척하면서도 입꼬리가 씰룩대는 재훈이의 표정은 놀리기 딱 좋게 생겼다.
"한 이 학년인가? 좀 됐어요."
"대박! 오래됐네. 너넨 만나면 뭐 해?"
"자주 안 만나요. 그냥 학원에서 보고 인사하고 가끔 집에 가서 놀아요."
"헐, 부모님도 다 아셔?"
"네, 전에 우리 엄마랑 셋이 키즈카페 놀러 갔어요."
사 학년이라고 방심했다. 육 학년은 연애 상담도 자주 해줬는데 두 살 차이 난다고 뭐가 크게 다를 줄 알았나 보다. 나도 모르게 재훈이 여자친구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양말 색이 형광 주황색이라니 범상치 않은데? 눈웃음이 매력적인 것 같기도 하고.' 꼭 시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샅샅이 훑어본다. 아직 학기 초니까 재훈이랑 좀 더 친해지면 누가 어떻게 고백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곧 있으면 화이트데이인데 그런 것도 챙기려나? 수줍게 츄파춥스를 여자친구에게 건넬 재훈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츄파춥스는 너무 유치원 수준인가? 사 학년 담임을 맡은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어서 열한 살의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아직 멀었다.
라떼는 정식으로 사귀고 그런 건 노는 친구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초등학생의 연애에 대해 쉬쉬하셨던 것 같다. "너네가 무슨 연애야. 그냥 친구지~"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쉬쉬하며 넘어가기엔 나를 포함한 몇몇 초딩은 이미 심장이 뜨거웠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보다 빼빼로데이가 더 큰 행사였다. 밸런타인데이는 겨울 방학중이고 화이트데이는 학년 초라서 애매했다. 빼빼로데이가 있는 십일월 정도면 추억도 꽤 쌓였겠고, 겨울 방학도 얼마 안 남았겠으니 고백했다가 까여도(?) 한 달만 버티면 되는 때였다. 그 당시에 이렇게까지 분석 적해본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다. 누군가에게 줄 빼빼로를 고심해서 골라본 기억은 오 학년, 열두 살 때가 처음이다. 신기하게 그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두상은 옆으로 납작했고 짧은 곱슬머리를 한 남자애였다. 순하게 눈꼬리가 내려가 있었고 코가 작고 동글동글했으며 입술이 도톰했다. 키는 크지 않았어도 어깨가 다부진 편이라 여름이면 오일 중에 삼일은 입고 다녔던 연한 베이지색 티셔츠가 멋지게 어울렸다.
키가 백팔십을 훨씬 웃도는 아버지를 닮아 이미 유치원 때부터 신장이 우월했던 나는 그 애보다 키가 크다는 게 부끄러웠다. 가까이 서있지를 못했다.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보던 커플은 전부 남자가 더 컸다. 그래서 오 학년이 끝나도록 좋아하는 티도 잘 못 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이 우리 둘을 몰아가면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자리를 피하기만 했다. 정말 키 차이가 우리 사이의 걸림돌이었는지 그 아이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만약 그 아이가 생각보다 크게 신경을 안 썼다면 좀 억울할 것 같다.
어쩌다 까무잡잡한 곱슬머리 소년이 좋아졌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자세하게 남은 기억은 없다. 다만 그 아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과 눈빛이 카스텔라처럼 폭신했었던 기억이 난다. 또,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옷집 근처를 자꾸 맴돌았다는 것도. 다행히 홀로 아련한 마음은 아니었다는 걸 그다음 해 십일월달이 돼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야! 너 나오래." 십일월 십일일 아침, 교실 뒷문이 살짝 열리더니 그 아이의 친구가 대신 나를 불렀다. 복도로 나가보았더니 그 아이가 내게 왕빼빼로 다섯 개가 꽂힌 빼빼로 다발을 건네고는 아무 말 없이 자기 반으로 뛰어갔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가 준비한 빨간색 롯데 빼빼로 상자를 그 아이의 친구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상황을 눈치채고 야유하는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도 누가 봐도 태어나 처음 고백받은 소녀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이 빼빼로 금지령을 내렸던 터라 다발을 등 뒤에 감추어 사물함에 넣어놓았다. 수업시간에도 계속 사물함 쪽만 바라봤던 것 같은데 선생님은 다 눈치채고 계시지 않았을까. 집에 가는 길엔 자랑하고 싶어서 무겁지도 않은 빼빼로 다발을 성화 봉송하듯 양손에 조심스럽게 들고 갔다. 집에 도착해서 꺼내보니 대왕 빼빼로 하나가 부러져 있어서 맘이 쓰렸던 기억이 난다.
육 학년 때 받은 빼빼로 다발은 중학교 일 학년이 되어서도 내 방 비밀 서랍에 모셔두었다. 오백 원짜리 롯데 빼빼로 과자 상자가 아니라 모닝글로리에서 파는 삼천 원짜리 빼빼로 다발을 좋아하는 애한테 받았다는 건 그럴 만한 사건이었다. '먹기 아깝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거였다. 결국 이년 후에 과자는 썩어서 버려졌지만 포장 리본은 따로 보관했었다. 경록이 잘 사니? 자니? 내 말 들리니?
심장이 뜨거웠던 초딩시절을 떠올리며 아이들의 연애 상담에 꽤 진지하게 임하는 편이다. 나도 그땐 진심이었으니까 얘네도 비슷하게 애타려니 싶다. 그렇게 귀 기울여 사연을 듣다 보면 어디서 다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남자 친구가 너무 연락을 안 한다던가, 다른 여자애랑 자꾸 친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친한 친구를 좋아하게 됐는데 사이가 멀어질까 봐 고백을 못 하겠다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른들의 연애랑 크게 다른 게 있나 싶을 때도 있다.
"선생님, 제가 왜 남자 친구를 안 만드는지 알아요?"
재훈이의 연애 소식을 듣고 추억에 잠겨 있던 내게 옆에 있던 진서가 묻는다.
"응? (안 물어봤는데) 왜 안 만드는데?"
"제가 이학년 때 고백도 받아보고 했거든요?(자랑하고 싶었구먼) 근데 남자친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나중에 군대도 가야 하고 거기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떡해요? 그래서 카톡으로 헤어지자고 했어요."
아니 이건 무슨 전개인가. 할아버지가 국가 유공자이신가. 어떻게 이야기가 저렇게 흘러가지? 그리고 카톡 이별? 얘네는 그게 당연한 건가? 내가 방심했다. 아무래도 초딩의 연애는 어른의 연애와는 다를 것 같다.
올해는 우리 반에 또 어떤 커플들이 생겨날까? 작년 육 학년 아이들 중엔 일 학기 때 세 커플이 나왔다가 이 학기에 다 헤어졌었다. 사 학년이라고 방심하지 말고 귀를 쫑긋 세워봐야겠다. 내게 빼빼로 금지령을 내릴 자격은 없다. 이십 년 전의 달달한 추억을 아직도 종종 꺼내어 녹여 먹는 범법자가 아닌가. 어차피 막아봤자 몰래 될 놈(?)은 다 될 것인데 의미가 있을까. 실컷 속앓이도 해보고, 표현도 해보고, 질투도 해보렴 얘들아. 난 뒤에서 대리만족하며 흐뭇하게 지켜볼 속셈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나처럼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치지 말란 말이야! 어디 한 번 사랑의 작대기를 실컷 날려보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