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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r 20. 2024

초딩의 연애



"선생님, 저기 초록색 후드티 입은 애가 재훈이 여자친구예요."

급식에 데리야키 닭 날개 구이가 나와서 신나게 뜯고 맛보고 있던 때였다. 4학년 아이들은 좀처럼 내가 식사에 취해 있을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연애 소식은 언제나 흥미로우니 입에 닭고기를 물고 열심히 대꾸를 해본다.

"오~ 진짜? 저 초록색 티셔츠 입은 친구?"

"재훈아,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꼬리가 씰룩대는 재훈이의 표정은 놀리기 딱 좋게 생겼다.

"한 2학년인가? 좀 됐어요."

"대박! 오래됐네. 너넨 만나면 뭐해?"

"잘 안 만나요. 그냥 학원에서 보고 인사하고 가끔 집에 가서 놀아요."

"헐, 부모님도 다 아셔?"

"네, 전에 우리 엄마랑 같이 셋이 놀러 가고 그랬어요."

4학년이라고 방심했다. 6학년 애들은 연애 상담도 자주 해줬는데 두 살 차이 난다고 뭐가 크게 다를 줄 알았나 보다. 나도 모르게 옆 반 재훈이 여자친구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좀 더 친해지면 누가 어떻게 고백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곧 있으면 화이트데이인데 그런 것도 챙기려나? 수줍게 사탕목걸이를 여자친구에게 건넬 재훈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귀엽기가 그지없다. 사탕목걸이는 유치원인가? 아직 만난지 한 달도 안 되어서 4학년 수준을 아직 잘 모르겠다.

라떼는(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땐) 정식으로 사귀고 그런 건 노는 친구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도 초등학생의 연애에 대해 쉬쉬하셨던 것 같다. '너네가 무슨 연애야. 그냥 친구지~' 그런 말들을 자주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쉬쉬하며 넘어가기엔 나를 포함한 몇몇 초딩은 이미 심장이 뜨거웠다.

  누군가를 처음 좋아해 봤던 기억은 5학년, 열두 살 때가 처음이다. 신기하게 그 아이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짧은 곱슬머리를 한 남자애였다. 눈이 선하고 코가 둥글둥글했으며 입술이 도톰했다. 키는 크지 않았어도 몸집이 꽤 좋아서 맨날 입고 다니는 베이지색 티셔츠가 멋지게 어울렸다.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신장이 우월했던 나는 내가 그 애보다 크다는 게 부끄러웠다. 지금도 흔하지는 않지만 그때 내가 텔레비전이나 만화에서 보던 커플들은 전부 남자가 더 컸다. 그래서 좋아하는 티도 확 못 냈다. 정말 키 차이가 우리 사이의 걸림돌이었는지 그 아이에게 대놓고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만약 그 아이가 생각보다 크게 신경을 안 썼었다면 좀 억울할 것 같다.


어쩌다 그 아이가 좋아졌는지, 우리 사이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엄청 길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던 것 같다. 다만 내가 멀찍이서 그 아이를 자꾸 물끄러미 바라봤었다는 것과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하시는 옷집 근처를 자꾸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짝사랑은 아니었는지 빼빼로 데이에 그 아이에게 3000원짜리 빼빼로 다발을 받았다. 호랑이 담임 선생님이 모조리 상술이라며 빼빼로 금지령을 내렸었기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가방 안에 다발을 겨우 숨겨 집에 들고 갔었다. 그러던 중에 왕 빼빼로 하나가 부러져서 어찌나 맘이 아팠었는지.


3년 정도 먹지 않고 내 방 비밀 서랍에 모셔두었다가 결국 빼빼로는 썩어서 버리고 포장 리본은 따로 또 보관했었다. 500원짜리 롯데 빼빼로가 아니라 모닝글로리에서 파는 3000원짜리 빼빼로 다발을 좋아하는 애한테 받았다는 건 그럴 만한 사건이었다. 경록이 잘 사니? 자니? 내 말 들리니?

심장이 뜨거웠던 초딩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아이들의 연애 상담에 꽤 진지하게 임하는 편이다. 나도 그땐 진심이었으니까 얘네도 비슷하게 애타려니 싶다. 그렇게 귀 기울여 사연을 듣다 보면 어디서 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남자 친구가 너무 연락을 안 한다던가, 다른 여자애랑 자꾸 친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맘에 걸린다던가, 친구를 좋아하게 됐는데 사이가 멀어질까 봐 고백을 못 하겠다는 경우도 있다. 또, 사귀면 챙겨줘야 되는 게 귀찮아서 고백을 안 한다는 애들도 있다. 어른들의 연애랑 뭐가 많이 다른가 싶다.

"선생님, 제가 왜 남자 친구를 안 만드는지 알아요?"

재훈이의 연애 소식을 듣고 타임머신을 타고 있던 내게 옆 자리에 앉아있던 진서가 묻는다.

"응? (안 물어봤는데) 왜 안 만드는데?"

"제가 2학년 때 고백도 받아보고 했거든요?(자랑하고 싶었구만) 근데 남자친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나중에 군대도 가야 하고 거기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떡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 할아버지가 국가 유공자이신가.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가 흘러가지? 내가 방심했다. 아무래도 초딩의 연애는 어른의 연애와 다를 수도 있겠다.

올해는 우리 반에 또 어떤 커플들이 생겨날까? 난 11월에 빼빼로 금지령은 내리지 말아야지. 어차피 막아봤자 될 놈(?)은 다 될 것이고 몰래몰래 거래가 이루어질 테니 안 막을 게. 대놓고 사랑의 작대기를 날려보거라 얘들아. 난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볼 속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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