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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r 27. 2024

선생님, 그거 맥주 아니에요?

학교에서 신호등 하나 건너면 되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됐다.


1년 차에는 어떻게든 월세를 아껴보겠다며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의 집에서 출퇴근했다.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해드뱅잉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학교 앞 LH 행복주택에 공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크기가 4평이라 고급 고시원 느낌이었지만 신축이라 깔끔했다.


방 크기보다 고민했던 부분은 집과 학교가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는 것. 편의점에서 손에 맥주캔을 들고 우리 반 아이를 만나면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 그렇지만 1년 동안 1시간 반 거리를 출퇴근하며 생긴 피로가 워낙 두툼해서 그런 고민들을 사뿐히 즈려밟았다.


  장점은 너무나 확실했다. 저렴한 월세와 출퇴근 거리가 죽여줬다. 퇴근하고 5분만 걸으면 내 방 침대에 몸을 눕힐 수 있다니! 월세를 내는 날은 나라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나도 부모님이 열심히 낸 세금 혜택을 보는구나 싶었다. 오롯이 혼자 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것도 좋았다. 귀여운 맹구 콧물 시계도 달고 빨간 체크무늬 이불도 샀다. 공간의 모든 걸 내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유는 나와 궁합이 좋았다.


  한편 단점들은 서서히, 자잘하게 드러났다. 예상대로 편의점에서 4캔 만원 맥주를 살 때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쫄보가 되었다. 해가 떠있을 땐 산책할 때도 마스크를 끼고 다녔다. 애들한테 거리 다닐 땐 스마트폰을 보지 말라고 잔소리한 게 생각나서 길 다닐 땐 앞만 보고 걸었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외진 횡단보도에서도 신호를 칼같이 지키는 훌륭한 시민이 되었다. 주변 학원가에 햄치즈토스트를 잘하는 집이 있는데 아이들이 자주 먹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발걸음 하는 일이 줄었다.


  인근 산부인과에서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고 나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옆 반 아이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바로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나는 아직 미혼인데, 아이가 집에 가서 옆 반 선생님이 산부인과에서 걸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성교육 시간에 아이들에게 산부인과를 찾는 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가르쳤는데 이런 걱정이 드니 참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내 사연을 들은 아빠는 내가 유난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어쩌겠나. 아이들한테 동물 복지 인증 마크에 대해 알려준 다음엔 가격이 2배여도 그걸 사 먹어야 할 것 같고, 등하교할 때 헬멧을 쓰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다 보니 나도 헬멧 없이 자전거를 못 타겠는 걸... 얼굴이 잘 가려지는 계절별 모자와 검은색 마스크를 넉넉히 사두는 수밖에 더 있겠나. 갑갑해도 내가 그렇게 상겨먹었는 걸 어쩌겠나.


나중에 학교를 옮기고 집이 학교에서 멀어지는 자유의 날을 종종 꿈꾼다. 그날이 오면 집 주변 산부인과에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야지. 그날이 오면 먹고 싶은 햄치즈토스트도 맘 편히 사 먹고 그날이 오면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도 천천히 골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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