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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Apr 17. 2024

선생님의 만우절 장난


'2024년 4월 1일'


출근해서 칠판에 날짜를 적으며 알아차렸다. 오늘 만우절이네! 다행히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아이들이 분해서 콧김을 씩씩대도록 만들 장난을 떠올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등교 시작 시간까지는 십 분도 남지 않은 때였다. 십분 안에 신박한 장난을 준비하기에는 나의 개구쟁이 능력치와 순발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일 년에 단 하루 합법적으로(?) 장난을 칠 수 있는 날을 흘려보내기는 아까웠다. 아쉽지만 작년에 써먹은 장난을 재탕하기로 했다.


<오늘의 시간표>

'1교시 수학, 2교시 수학, 3교시 수학, 4교시 수학, 5교시 수학'


 시간표를 온통 수학으로 도배해 놓았다. 부임 첫해에 만우절 장난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급조한 레퍼토리다. 머리 큰 육 학년에게도 통했으니 사 학년에게도 통할 것이리라.


 애들 놀려먹을 생각을 하느라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침대에 몇 번씩 다시 누우며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이었는데 피곤이 싹 가셨다. 장난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비타민 음료 마시는 것보다 효과가 좋아서 일요일 밤마다 다음날 장난칠 궁리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거사 전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얼굴 근육들의 깨방정을 조금이라도 숨겨 보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누가 먼저 도착할까?’ 삼월 첫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오랜만이었다.


 '툭' 신발장에 실내화주머니 던지는 소리가 들리고 은하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나쁘지 않아. 은하는 보통 교실을 한 바퀴 쓱 둘러보고 자리로 가니까 알아챌 거야.’

 “턴탠님 안냐세요~”

 “으응.(어서 와 나의 첫 재물~)”

 혀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고개를 까딱하는 은하의 인사법에 오늘도 웃음이 피식 새어나갈 뻔했다. 평소보다 짧고 건조하게 대답하고 컴퓨터 모니터만 응시했다. 괜히 눈을 마주쳤다간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킬까 싶었다. 그런데 은하는 바로 내게 와서 주말에 새로 산 보라색 치마를 자랑하기에 바빴다. 뒤이어 도착한 진서도 책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은하와 치마 쇼핑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뭐지? 이게 아닌데?'싶던 그때였다.

 "어? 왜 시간표에 수학이 5개지?"

 다음으로 도착한 우진이었다. 남다른 눈썰미와 우렁찬 목소리로 나의 장난을 널리 퍼뜨려줄 구원자! 우진이는 친구들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같은 말을 계속해서 힘들었는데 이럴 땐 또 쓸모가 있었다.


"야, 빨리 와서 이거 봐. 오늘 시간표 하루 종일 수학이야!"


"뭔 소리야?"


"이거 봐. 수학, 수학, 수학, 수학, 수학이잖아."


"그게 말이 돼?"


"아 근데 오늘 만우절이잖아. 샘 이거 장난이죠? 진짜 아니죠?"


아뿔싸... 우진이의 눈치가 생각보다 빨랐다. 시작부터 위기였다. 침착해야 했다.


"엥 맞는데? 우리 반이 삼월 초에 진단평가 수학 점수 제일 낮게 나와서 오늘 수학 공부만 해야 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오늘 만우절이잖아요."


"어 오늘 만우절이네? 나 지금 알았어! 못 믿겠으면 교장실 가봐! 교장선생님이 이따가 너희 수학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지 한 번 보러 오신다고 하셨어."


"네에? 아, 망했다. 하루 종일 수학이 뭐야. 태어나서 최악의 날이야."



 급한 마음에 꺼내 든 교장선생님 카드가 먹혔다. 최악의 날 이래! 크크크. 목소리 큰 우진이가 설득되자 다른 아이들은 쉽게 넘어왔다. 은하, 진서, 우진이는 왜 우리가 하루 종일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도착하는 아이들에게 침 튀기며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흥분해서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털썩 바닥에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절망했다. 월요일 아침 교실 분위기치고는 활기가(?) 넘쳤다. '좋아, 넘어왔어!' 마스크 속에 숨어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설픈 선생의 발연기에 넘어가는 상황이 재미나기도 하고 애들이 귀엽기도 해서 시간을 더 끌까 싶었다. 그런데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힘이 빠져 앉아있는 얼굴들을 보자니 맘이 약해졌다. 일교시 시작 직전에 장난 커밍아웃을 하고 말았다.


 "얘들아. 하루 종일 수학 공부하는 소감이 어때?"

 "집에 가고 싶어요."

 "오늘 아침에 먹은 빵 토할 것 같아요."

 "그래? 토하면 안 되지! 왜냐면 이건 장난이니까~ 메롱 메롱~ 너네 솔직히 속았지?"

"네에???? 아 뭐예요~ 선생님이 장난을 치면 어떻게 해요!!"


 가벼운 장난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 아이들이 속아서 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나는 도파민이 뿜뿜 솟았다. 내가 월요병을 잊고 하루를 시작했으니 내 기운을 받는 아이들의 하루도 조금은 더 이로워지지 않았을까?


 하교 후 들어보니 같은 학년의 선생님들끼리 교실을 바꿔 들어가서는 모르는 척 수업을 해봤다고 한다. 너희들이 말을 하도 안 들어서 선생님이 바뀐 거라고 하면서. 처음엔 안 믿다가 일교시 수업까지 해버리니까 우리 선생님 돌려달라고 잘못했다고 했단다. 울상이 되는 아이들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을 겨우 꾹 참았다고 했다.


 애들은 모르겠고 오늘 하루 장난을 시도한 선생님들은 즐거웠던 것이 분명하다. 내년엔 장난 재탕은 그만하고 미리미리 준비해 봐야지. 진짜 교장선생님을 모셔볼까? 식단표를 고쳐볼까? 회장 부회장과 작당 모의를 해볼까? 선생님의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즐거워진 선생님과 하루를 보낼 아이들을 위해, 만우절 장난은 계속되어야 한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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