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람티 Apr 27. 2024

갑옷이 필요한 순간



 "선생님은 회사원보다 편하게 입고 다녀도 되지 않아? “


 "그렇지, 체육시간도 있으니까 운동복 입고 다녀도 뭐라고 안 그러지."


 "완전 좋네! 내가 너면 맨날 청바지나 운동복만 입고 다닐 듯."


 "우리 학교에 맨날 티셔츠랑 운동복 바지 입고 다니는 샘 있어."


 "너도 그러고 다녀! 얼마나 편해."

 


  친구가 다니는 회사는 일주일에 하루 금요일만 '세미 캐주얼 데이'라고 정해놓고 청바지나 맨투맨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새삼스럽게 내 출퇴근 복장이 자유롭구나 싶었다. 청바지나 맨투맨을 입고 운동화까지 신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체험학습이 있거나 앞 구르기 시범 등을 보여야 하는 날이면 위아래로 운동복 바지를 입고 등교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 반에 무슨 과목이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옆반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도 속속들이 모르기 때문에 복장 검사를 받을 일이 없다. 일반 직장인들과 다른 나름의 특권이다.


  어울리는 스타일의 옷 한 종류를 여러 벌 사두고 돌려 입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옷을 사거나 고를 때, 관리할 때 드는 에너지를 줄이려는 목적이라고 한다. 효율적인 생각이고 내 근무 환경에서는 쉽고 편하게 실천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매일 청바지에 맨투맨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눈치를 봐야 한다거나 잔소리할 상사도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수업 준비에 집중하고 아이들과 더 편하게 놀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일 아침 당근 양배추 주스를 마시면 몸에 좋다.'는걸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벌 신사로 살아가는 삶도 상상에서 그치고 만다. 


 교직을 시작하고 이 년 정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멀끔한 출근복을 사들이기에 바빴다. '이제 쭉 돈 벌테니까', '공개수업에서는 여러 사람 앞에 서기도 할 테니까', '젊을 때 이 것 저 것 예쁜 옷 많이 입어봐야 하니까'. 새 옷이 필요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 멋지게 꾸미고 다니는 신규 선생님들이 많은 탓도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이십 대 중반의 동기 선생님들인데 MZ세대라 그런가 벌써 자기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회사를 몇 년 다니다가 다시 수능을 봐서 교대에 늦게 들어간 드문 케이스였다. 동기 선생님들과 나이 차이가 많게는 일곱 살까지 났다. 연배(?)가 감춰질 수 없겠지만 곱게 나이 든 중고 신입이고 싶었다. 선생님들이 많이 입는 가디건 브랜드를 눈여겨보기도 하고 장화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데 따라 사기도 했다. 


 그렇다고 쉽게 팍팍 쇼핑을 하지는 못해서 옷 하나 사려면 공이 많이 들었다. 예를 들어, 빨간 카디건을 하나 사려고 모바일 쇼핑 어플을 여러 개 뒤지며 가격 비교를 하고 근처의 아울렛도 한 바퀴 돌아야 겨우 하나 살까 말까 하는 식이었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온라인 쇼핑몰 구경하는 것에 마지막 남은 손가락 힘을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스마트폰 화면은 마지막으로 본 옷 쇼핑몰에서 멈춰있었다. 퇴근하면 집 앞에 택배가 놓여있는 장면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교실에서 애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간간히 동료 선생님만 마주치는 학교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걸까 싶었다. 이 에너지를 수업 연구나 취미 생활에 쓰는 게 낫겠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비슷한 짓을 계절 시작마다 반복했다.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아."


 "응?"


 "청바지나 맨투맨 대신 슬랙스에 자켓을 챙겨 입고 다녔던 것 말이야. 아직 교사로서 쥐뿔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겉보기라도 번듯하게 갖춰 입어야 위안이 되었던 거지. 갑옷? 방패? 아니었을까?"



  내가 말하고도 일리가 있네 싶었다. 임용고시 통과했다고 바로 짠 하고 선생님이 되어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 서는 게, 그들의 시간과 안전을 책임지는 게, 버겁고 긴장됐다. 특히 마지막 교생 실습을 대차게 말아먹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애들 앞에서 한 번 버벅거리기 시작하더니 교생 실습 삼 주 내내 칠판 앞에서 벌벌 떨다가 집에 돌아와 울기를 반복하고 잠도 설쳤다. '내가 임용고시를 봐도 될까, 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의심을 품고 임용 시험을 준비했으니 불안한 맘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첫 해가 무사히 지나갔을 때도 '애들을 잘 만나서 그럴 수도 있어. 운이 좋았지.'라며 안심하지 못했다. 삼 년 차가 된 지금도 '이 주변 애들이 순해서 그래.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 감당 안 될 수도 있어.'라는 불안을 품고 지낸다.


  뭣도 없는 나를 뭐라도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 같은 옷'을 찾아 입었다. 아이보리, 브라운 색감의 부드럽지만 단정한 스타일의 옷을 주로 골랐고 봄이나 가을엔 차분한 색감의 스카프도 하고 다녔다. 길거리에서 싸게 파는 옷은 더 이상 사지 않고 아웃렛에서 이름 있는 브랜드의 옷만 샀다. 할인하는 옷만 몇 개 골라도 금방 몇 십만 원이 나갔다. 질 좋은 옷 사서 기분 좋게 오래 입는다는 취지였지만 내 월급에는 과분한 소비였다. 대신 배달 음식이나 테이크아웃 커피에 돈을 쓰지 않고 방학 때 해외여행도 잘 안 다녔다. 나름 취사선택을 한 것인데 현명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날이 좋으면 언제든 운동장에 나가 아이들이랑 뛰어놀 수 있는 운동복, 퇴근길에 가볍게 산책하고 싶어지는 운동화, 앞 구르기 시범을 보여도 여유로운 펑퍼짐한 맨투맨 티셔츠. 내 출근복이 점점 그렇게 변해가면 좋겠다. 교실에서 마음도 같이 편해지면 좋겠다. 그렇게 입고도 실력으로 승부해 버리는 고수 선생님이 될 날을 꿈꾼다. 그렇지만 아직은 한~참 내게 갑옷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수학 시간에도 몇 번을 말이 꼬여서 버벅거렸고, 학부모님과 약속한 상담 시간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연락을 드렸고 애들 수학 글쓰기 공책 검사를 며칠 미루고 있다. 지난주에는 애들 소풍 데리고 나간다고 실컷 떠서 출장 신청을 미리 해놔서 그날 아침에 교감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겨우 처리했다. 


 갑옷을 벗어던져도 온몸의 잔근육으로 승부할 수 있는 그날이 언젠가는 올까. 얼마 전에 동료 부장님께 "부장님, 언제쯤 교실에서 여유라는 게 생길까요?"라는 질문을 했을 때 "오호호, 그런 거 안 생겨요. 애들은 매년 새로워!"라고 하셨다. 야속한 부장님의 답변을 우스갯소리로 듣고 싶다. 아차, 그러고 보니 연차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부장님이 나보다 더 '선생님 같은 옷'을 입고 다니신다. 블라우스에 긴치마, 단정한 슬랙스가 참 잘 어울리신다. 젠장! 퇴직 때까지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일단 오늘은 금요일이고, 퇴근이다. 무거웠던 갑옷은 벗어던져 아지. 단정한 블라우스랑 슬랙스는 주말에 쳐다도 볼 테다. 펑퍼짐한 면바지에 짧은 크롭 티셔츠를 입고 가볍게 놀러 다녀야지. 갑옷은 세탁해서 옷걸이에 고이 걸어두었다가 월요일 아침에 다시 걸치자. 전사여 일단 후퇴!


이전 14화 음악시간에 밤양갱을 불러도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