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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Apr 27. 2024

갑옷이 필요한 순간

 "선생님은 아무거나 입고 다녀도 되지 않아? “

 "그렇지, 체육시간도 있으니까 운동복 입고 다녀도 뭐라고 안 그러지."

 "완전 좋네! 내가 너면 맨날 청바지나 운동복만 입고 다닐 듯."

 "우리 학교에 맨날 맨투맨에 츄리닝 바지 입고 다니는 샘 있어."

 "너도 그러고 다녀! 얼마나 편해."

 

  일반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얘기하며 새삼스레 학교에 청바지랑 츄리닝만 입고 다녀도 되는 거겠구나 싶었다. 일반 직장인들과 다른 나름의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나는 어쩌다 굳이 슬랙스와 단정한 니트 정도의 무난한 출근복을 입고 다니는 걸까?

  선생님이 되고 2년 정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멀끔한 출근복을 사들이기 바빴다. 이제 쭉 돈 벌테니까, 여러 사람들 앞에 설 일이 많을 테니까, 젊을 때 이 것 저 것 예쁜 옷 많이 입어봐야 하니까. 새 옷을 살 이유는 차고 넘쳤다.

  발령받은 학교에 젊은 신규 교사들만 가득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대학 갓 졸업한 동기 샘들이 다들 어쩜 그렇게 화장도 자연스럽고 어울리는 옷도 잘 골라 입는가 싶었다. 나도 비슷하게는 하고 다니고 싶었다.

 배달 음식 안 먹고 방학 때 해외여행은 꿈도 안 꾸며 모은 돈을 출근복 사는데 썼다.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온라인 쇼핑몰 구경하는 것에 마지막 남은 손가락 힘을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항상 옷 쇼핑몰이 마지막 본 화면이었다. 퇴근하면 집 앞에 택배가 놓여있는 장면이 익숙했다.

 "아마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아."

 "응?"

 "내가 아직 교사로서 쥐뿔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선생님 같은 옷이라도 입어야 할 것 같았던 거지. 갑옷? 방패? 이런 거 아니었을까?"

  내가 말하고도 일리가 있네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임용고시 통과했다고 짠 하고 선생님이 되어 스물몇 명 아이들의 앞에 서는 게 버거웠다. 처음이니까 당연한 건데 잘하고 싶은 욕심은 많아서 몸에 힘은 잔뜩 들어가 있었다.

  뭣도 없는 나를 뭐라도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갑옷처럼 '선생님 같은 옷'을 입었다. 아이보리, 브라운 컬러의 단정하한 색감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들을 골랐다. 길거리 옷은 더 이상 사지 않고 아웃렛에서 이름 있는 브랜드의 옷만 샀다. 할인하는 옷만 골라도 금방 몇 십만 원이 나갔다. 좋은 옷 사서 오래 입겠다는 취지였지만 내 월급에는 과분해서 맘이 편하지 않았다.

 

   언제든 운동장에 나가 아이들이랑 뛰어놀 수 있는 편한 바지, 퇴근길에 가볍게 산책하고 싶어지는 운동화, 앞 구르기 시범을 보여도 배꼽 안 보이는 펑퍼짐한 맨투맨 티셔츠. 점점 내 출근복이 그렇게 변해가면 좋겠다. 그렇게 입고도 실력으로 승부해 버리는 고수가 될 날을 꿈꾼다. 보통 허술해 보이는 고수가 진짜 멋지니까.

 그렇지만 아직은 한~참 내게 갑옷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수학 시간에도 몇 번을 말이 꼬여서 버벅거렸고, 수업 종이 울리고 나서야 연필을 깎으러 가는 아이에게 하찮은 잔소리를 했다. 학부모님과 약속한 상담 시간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연락을 드렸고 애들 수학 익힘책 걷은 걸 검사를 다 못해서 돌려주는 걸 또 미뤘다.

  갑옷을 벗어던져도 온몸의 잔근육으로 승부할 수 있는 그날이 언젠가 오겠지. 일단 오늘은 퇴근이다! 무거웠던 갑옷은 벗어던지고 보송보송한 수면잠옷으로 갈아입자. 갑옷은 옷걸이에 고이 걸어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힘을 내서 입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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