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점심시간에 혼자 놀이터에서 그네 타는 네 뒷모습을 봤어. 네가 운동장을 등지고 그네를 타고 있길래 네 표정을 살피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 경민이랑 승규랑 부딪혀 넘어져서 정신 파는 사이에 너는 사라지고 그네만 혼자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는 거야. 조금만 더 일찍 갈 걸 싶었지. 혼자 흔들리던 그네가 멈출 때까지 자꾸 놀이터 쪽만 바라봤어.
율아, 너랑 나랑 많이 닮은 것 같다고 했던 내 말 기억해?
나도 쉬는 시간에 얘기 나눌 친구가 별로 없어서 괜히 자꾸 화장실만 들락날락했었어. 내 얼굴 어느 구석 하나 맘에 들지 않아서 자신감이 없었거든. 우리 엄마가 아무리 대단하다 예쁘다 나에게 칭찬해 줘도 믿지 않았고. 지금의 너처럼 말이야. 어쩌다 시선이 나한테 집중되면 온몸이 굳어서 이상한 소리만 뱉어댔어. 또,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한테 표현도 잘 못하고 뚝딱거렸지. 근사해 보이는 저 사람은 날 안 좋아할 거라고 미리 생각해 버리는 거야. 물론 지금도 그럴 때가 있어.
너는 네 존재가 꼭 먼지 같다고 했었지? 설명 없이도 나는 그 말이 이해가 갔어. 네 맘이 어떨지도 너무 잘 알겠어서 그 말을 들은 날은 유독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
율아. 너랑 나는 손에 바늘 하나 꼭 쥐고 사는 것 아닐까. 이거라도 지녀야 맘이 편한 거야. 속으로는 사람한테 관심도 기대도 많은데 그만큼 상처도 잘 받아서 스스로를 지킬 하찮은 무기가 필요한 거야. 나한테 상처 줄 것 같은 사람에게 칼날 대신 소심하게 바늘이라도 겨누어 보는 거지. ‘자 덤벼! 나 손에 바늘 있거든?’
근데 바늘 쥔 사람도 실은 무섭기는 마찬가지인 거야. 식은땀도 흐르고 세게 쥐어서 손에 자국이 남기도 하지. 내 손은 이렇게 크기라도 한데 네 작은 손에 들려 있기에는 아무리 작은 바늘도 버겁지 않을까. 어디 바늘 떨어뜨릴까 걱정하고, 실수로 곁에 있는 누구 하나 찌르지는 않을까 벌벌 떨면서 말이야.
근데 율아, 그 바늘 끝이 자주 너를 향하고 있지는 않니?
‘아… 나 또 이러네. 진짜 싫다’
‘비슷하겠지. 내가 뭐 얼마나 달라질 수 있겠어…’
이런 말들로 스스로 콕콕 찌르고 있지는 않아?
선생님이 우리 반 학생이었다면 말이야. 나는 너랑 친구하고 싶을 거야. 점심시간마다 같이 그네도 타고 주말에는 네가 좋아하는 탕후루도 같이 먹으러 갈 거야. 네가 잘하는 모바일 리듬 게임이 내 취향은 아니어도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옆에 앉아 장난칠 거야. 네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네가 좋아서 말이야.
내 말 하나하나 기억하고는 안부를 물어주고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소심하게 방방 뛰기도 하는 네가 좋아. 큰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다가 이마 콩하고 넘어지고는 헤헤 미소 짓는 것도 매력 있고, 네가 써주는 솔직 담백한 편지도 좋아. 네가 내 편이면 든든할 것 같아. 너랑 맨날 얘기하고 싶을 것 같아. 이건 널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 거 느껴지니?
그러니까 율아. 네 손에 쥔 바늘은 잠깐 내 손에 내려놓고 힘 좀 풀어보자. 정말 괜찮아. 선생님이 너랑 친구 하고 싶다는데 계속 손에 귀여운 흉기 쥐고 있을 거야? 그거 이리 잠깐 줘봐. 그리고 너 학교 졸업하면 같이 탕후루 가게 가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가게에 있는 탕후루는 다 먹어버리자. 뇌까지 단 기운이 가득 차서 얇은 바늘 따위는 생각날 틈이 없지 않을까.
대신 탕후루 꼬치 손에 잔뜩 들고 신나게 걸어보자 율아. 어디 또 콩하고 넘어져서 바지가 뜯어지기라도 하면, 네 마음에 생채기라도 나면 그때 다시 바늘 돌려줄게. 그땐 누군가한테 겨누는데 쓰지 말고. 네가 아끼는 옷이나 다친 네 마음을 정성스럽게 꿰매는데 쓸 수 있길 바라. 처음엔 서투르겠지만 연습하다 보면 바느질도 자연스러워지겠지.
우리 이제 바늘은 그렇게 쓰자 율아. 네 덕분에 선생님 바늘도 같이 봉인시켜 놓을게. 꼭 필요할 때만 꺼낼게. 너한테 놓으라고 한 바늘 나도 손에서 놓고 지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