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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y 04. 2024

투명망토의 요정


영화 해리포터를 보면 해리가 투명망토를 쓰고 학교의 출입금지 구역을 모험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기척을 느낀 무서운 교수의 손길이 바로 망토 앞까지 닿았을 땐 나도 같이 숨을 멈추며 조마조마했었다.


지금 내게 딱 그 망토가 필요하다. 투명망토를 쓰고 모험을 하는 대신 숨어다니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긴 하지만 말이다.



교직 생활은 큰 사건 사고 없이 한 해를 보내기만 해도 잘 하는 거라는 말에 위로를 받기도,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칼퇴 하는 것을 목표로 요즘을 살고 있다.


애들한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애썼던 지난 2년과는 많이 다른 상태다. 작년 말부터 교사로서의 많이 소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올해 새학기를 시작할 때 목표는 휴직하지 않고 일 년을 버텨보는 것이었다. 3,6,9년차에 찾아온다는 권태기가 잠시 찾아온 걸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지치지 않아야 해. 모쪼록 힘 풀고 하루 무사히 지내자.'라는 말을 출근길에 되뇌인다. 2년을 애쓰며 보냈으니 올해 정도는 흘러가듯 보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주문을 담아.


전에 안 하던 운동을 새로 시작했다. 밥도 잘 차려 먹는다. 집정리를 하고 유튜브를 보다가 잔다. 누군가가 꿈꾸는 교사의 갓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문득 같은 3년차인데도 여전히 열심인 선생님들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저 분들도 권태기가 있었을거야, 없었어도 나중엔 있을거야.’라고 치사한 정신승리를 하는 수밖에.


‘작년까진 나도 봄 소풍 꼭 챙겨서 데리고 나갔었는데.’


‘작년까진 나도 어린이날 이벤트 일주일 전부터 준비했었는데.’


아무리 힘빼고 지낸다지만 꼭 해야할 일들로 학교에 있는 시간은 여전히 분주하다. 어제도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아침 9시에 받은 카톡을 확인하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감정이 부끄러움이 씁쓸했다.



지난 2년처럼 이것저것 재미있는 일을 벌일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의 내 모습이 썩 흡족하지도 않다. 나는 어찌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김연우, 이별택시라는 곡을 아시나요?)


택시 아저씨 대신 붙잡고 징징댈 수 있는 선배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사로서 길을 잃은 것 같을 땐 교생 실습 때 만났던 선배님이 떠오른다. 평소에 잊고 지낸 것 같다가도 꼭 필요할 때만 그분을 떠올리는 나는 괘씸한 후배 놈이다.


교육대학교 2학년 때 2주 동안 강릉의 작은 학교에서 참관 실습생으로 있을 때가 참 좋았다. 배정받은 반에서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 보고 들었다. 내가 할 일은 뒤에 앉아서 일지에 배운 걸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창밖으로 황금빛 논이 펼쳐져 있어서 아이들과 선생님, 가을 풍경이 그림처럼 어울렸다. 그때가 대학시절 4년을 통틀어 가장 많이 배우고 느낀 2주였다.


감사하게도 말투 하나, 눈빛 하나 다 배우고 싶은 담당 선배 교사를 만났다. 내 사주팔자에 돈복은 크게 없어도 인복은 있다던데 이때도 귀인을 만났던 것 같다. (아닌가? 방황하던 때 이 분을 안 만났으면 진즉에 길을 틀어 새 삶을 살았으려나?)


우스갯소리로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깝다고 하는 1학년 교실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교실 분위기는 차분했다. 또 동시에 아이들이 서로 들을 줄 알고 자유롭게 소통할 줄 아는 이상적인 교실이었다. 그때 연륜 넘치는 수업을 경험하고 나서는 눈이 높아졌는가 보다. 선생님이 되고나서 항상 내 수업이, 학급 분위기가 부족하게만 보였다.


눈만 높은 길 잃은 양이 된 지금의 나는 다시 참관 실습생이 되어 한 2년은 실컷 배우고 돌아오고 싶다.귀염뽀짝한 투명 망토를 쓰고 선배님들 교실을 누비고 싶다. 교실 뒤쪽에 몰래 앉아 어떻게 학기 초 분위기를 형성하시는지, 학생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풀어나가시는지 하나하나 다시 보고 내 걸로 만들고 싶다.


월급 반만 줄 테니 그 인턴이 되어 배워볼래 하면 바로 그러고 싶다고 할 것 같다. 아니, 삼분의 일도 괜찮다(적금은 마저 부어야 하니깐). 영감도 받고 에너지도 충전하고 싶다. 지금 이렇게 흘려보내는 하루가 버티기만 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번 스승의 날엔 참관 실습 때 배운 선배님께 전화드리면서 이런 하소연을 하게 될 것 같다. 언젠가 저도 그런 수업할 수 있는 거냐고, 그 연차까지는 어떻게 버티신 거냐고, 저 지금 잠깐 이렇게 늘어져 있어도 되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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