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영상을 본 후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우리 반 아이가 내 말을 못 들은 척 딴짓을 계속했고 화가 나서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장면을 지나가던 학부모가 보더니 교실로 들어와 내 왼쪽 뺨을 때렸다. 그 앞에서 나는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꿈을 꾼 다음 날엔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서이초 사건은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교사 친구인 민영과 함께 토요일이면 폭염에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나서기 시작했다. 죽은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는 의미로 검은 옷과 모자, 신발을 신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검은 점이 되었다. ‘내년에는 어떤 학생이나 학부모를 만날지 몰라', '다음 학교로 이동하면 거긴 또 어떨지 몰라', '지금까지 그냥 운이 좋았던 걸 수도 있어.’ 하는 불안감이 커질수록 더 높이 피켓을 들고 더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억울한 교사 죽음 진상을 규명하라 규명하라!
교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토요일마다 마음이 비슷한 동료들과 검은 점으로 함께하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집회 피켓으로 파도타기 퍼포먼스를 할 때면 에너지가 솟고 든든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루는 큰 물결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큰 위안이 되었다. 검은 점이 모여서 물결이 되었고, 넓은 바다가 되어 나를 감쌌다. 더 이상 나는 학부모에게 뺨을 맞는 악몽은 꾸지 않았다. 실컷 울고 소리치고 노래하고 땀 흘리다가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우면 잠도 꿀맛이었다. 답답할 때 뭐라도 움직이면 나은 기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보단 앞으로의 내 미래가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큰 건 마찬가지였다. 내 그릇이 여기까지인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말 집회에 다녀와 월요일 아침에 교실에 가면 아이들은 평소와 같았다. 아침 인사를 하고, 공부하고, 뛰어놀고, 가끔 다투기도 했다. 예쁜 아이들의 모습과 집회 연단에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힘든 마음을 전하던 교사들의 모습이 겹쳐질 때면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들이, 또는 부모가 언제든 돌변해서 나에게 비수를 꽂을 수도 있다는 경계심이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듯했다. 이제는 마냥 멍청하게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이 씁쓸했다.
구 월 사일 서이초 교사 사망 사십 구제를 맞아 공교육 정상화의 날로서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교사의 파업을 둘러싸고 학교 안팎으로 잡음이 많았다. 교육부는 행동에 참여하면 인사상의 큰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했다. 슬픔과 무기력에 젖어 있던 교사들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고 교장, 교감 선생님은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교육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파업에 참여하려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일부 선생님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있을까 한 발짝 물러서기도 했다. 그분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겠지만 화력이 온전히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공교육 정상화의 날을 전후로 교사들끼리, 교사와 관리자 사이에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해야 했다. 파업 이후 교육부 장관이 눈물을 흘리며 태도를 바꾸는 척했지만 신뢰를 회복하기는 힘들었다. 강압적인 태도가 학교 내외부에 남긴 상처를 우리는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우리는 다시 앉았다. 선풍기와 얼음물 대신 멋진 단풍을 배경으로 앉아 있으니 팔자가 좋아졌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론은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시월 말 열린 집회에는 전국에서 교사 십이만 명이 모였다. 역대 최대 규모였다. 팔자가 좋아졌다면 집회 참여 인원이 두 배가 되었을 리 있을까. 대통령도, 교육부 장관도 노력하겠다고 한 마디씩 거들었으니 사람들은 뭐가 많이 바뀐 줄 아는 것 같다. 언론의 관심도 이미 차게 식었다.
교사가 아이의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을 고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아동복지법 십칠조 조항은 해가 지나고 새로운 가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개정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