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화는 식사 시간 근처에 읽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선생님은~ 오늘 기분 완전 손가락 다섯 개야!”
“왜요오~?”
“아침에 일주일째 모닝똥 쌌거든? 배가 너~무 가벼워! 흐흐흐”
"아 샘! 또 똥이야기! 샘 기분 좋으니까 그럼 오늘 수학 말고 체육 해요!"
"응?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흘러가지?! “
우리 반은 아침 조회 시간에 마음 손가락 펴기 활동을 한다. 수업 시작 전 기분을 손가락 한 개부터 다섯 개 사이로 펼쳐서 표현한다. 왜 손가락 한 개인지, 다섯 개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 동생이랑 싸웠는데 자기만 혼나서 억울한 이야기, 아침에 먹은 모닝빵이 맛있었다는 이야기, 주말에 키즈카페에서 유치원 친구를 만난 이야기 등 학교밖 일상을 주워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끔은 난감한 이야기도 섞여 들려온다. 아빠가 술 마시고 아파트 복도에 누워 노래를 부르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단다. 뭐라고 반응해야 하나 싶어서 “아빠가 힘든 일이 있으셨나 보다.”라고 얼렁뚱땅 넘어가 보려고 애쓴다. “그러면 우리 엄마가 술을 더 마셔야 될걸요?”라고 똑 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온다.
마음 손가락 활동은 아이들의 마음을 살핀다는 훈훈한 취지로 포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실은 혼자 사는 독거 선생님이 입에서 삶은 계란 썩은 냄새나지 않도록 실컷 쫑알거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야식으로 떡볶이를 시켜 먹어서 얼굴이 실컷 부었다거나 어젯밤에 모기를 잡았는데 흰 벽에 붉은 흔적이 남아서 속상하다는 푸념을 하는 식이다. 학교 앞에 수요일마다 오는 닭꼬치 푸드트럭 리뷰도 하고, 퇴근하고 옆반 선생님이랑 수제버거 맛집에 갈 거라고 자랑도 한다. 주제가 꽤 다양하지만 만성 변비 환자인 나에게 아침 시간의 가장 핫한 이슈는 모닝똥이다.
믿는 종교는 없지만 똥님이라는 신을 모시고 있다. 똥님께 소홀히 했다가 변기 위에 앉아 눈물로 참회한 적이 여러 번이라 순종하며 산다. 눈 뜨면 유산균부터 챙겨 먹고 물을 두 컵씩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릭요거트, 푹 익은 바나나, 아몬드는 항상 냉장고에 쟁여두고 똥달력도 마련해서 배변 상태를 기록한다. 쾌변을 본 날엔 갈색 색연필로 커다란 하트를 그리는 식이다. 갈색 색연필이라니, 쾌변하트라니 너무 깜찍한가 싶지만 뭐 내 방 달력은 나만 보니까. 얼마 전에 친구가 이 냄새나는 사연을 듣더니 차전자피환이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조용히 건네주었다. 장 속에서 불어나서 똥님 나오시는 길을 편하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새로운 재물의 효험을 기대해 보는 중이다. 이렇게 모닝 똥에 진심인데 어찌 그 간절함이 새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매끈한 고구마 크기의 황금똥을 싼 날은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펴고, 며칠 째 아랫배가 묵직하면 손가락 두 개도 겨우 펴게 된다.
초등 교사들 사이에 ‘아이들은 똥 얘기에 쌍디귿만 나와도 배꼽을 잡는다’는얘기가 있다. 똥을 주제로 한 그림책 중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가 있고, '똥볶이 할멈'이란 만화책 시리즈도 몇 년째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다. 모든 배움은 아이들의 흥미로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나도 똥얘기가 즐겁고 너희도 손사래 치는 척할 뿐 집에 가서 똥만화를 읽으며 즐거워할 테니 서로 윈윈 아닐까. 간혹, 똥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아이들이 있다. “아 더러워요 샘~.”이라고 말로 하는 게 낫다. 어떤 아이들은 입은 꼭 다물고 ‘할 말은 많지만 내가 참는다’는 새침한 눈빛을 보낸다. 그럼 나는 '열한 살이라 이거지, 십 대라 이거지.‘하고 깨갱하는 척 다른 화제로 돌린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슬슬 다시 똥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끈질긴 선생이다.
'우리 엄마가 잘 먹고 똥 잘 싸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거든? 사 학년 되었다고 깔끔한 척이냐고!’라는 말을 속으로 했던가 입으로 뱉었던가. 똥 얘기를 하다가 눈빛으로 차단당하는 날이면 속으로 씩씩거리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무슨 똥 얘기를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고작 열한 살짜리 아이가 여름 방학에 외갓집 변기를 막은 일로 지금까지 놀림받는다는 것? 변비에 좋다고 해서 먹어본 음식 목록 공유하기? 고등학교 때 오래 앉아있겠다고 버티다가 변비가 생겨서 얼굴빛이 이렇게 누레졌다는 것? 한 마디로 내가 살아온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이게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벌써 꼰대가 될 순 없으니 애들한테 나불거리다가 핀잔 먹는 것보단 똥을 주제로 단편 에세이라도 써보는 게 어떨까 싶다. 나처럼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만성변비인들이 읽어주지 않을까.
“오지 마! 나한테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 오늘 쉬는 시간에 나에게 다가오는 호준이에게 외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급했는지 다른 아이들도 일제히 내 쪽을 쳐다봤다. 나는 얼른 창문을 열고 엉덩이 주변으로 크게 부채질하는 시늉을 했다. 민망한 상황을 유머로 승화시키려는 나의 발칙한 시도였다. 내 기이한 행동을 지켜보던 아이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야야! 선생님 방귀 뀌셨다!” 상황 파악이 끝난 호준이가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방귀를 ‘뀌셨다’니! 그 와중에 방귀와 존댓말의 조합이 귀여워서 나부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들도 내가 실실거리는 얼굴을 보고 맘 놓고 비웃었다. 까르르 까르르 어쩜 그렇게 한 마음 한 뜻인가 싶었다. 집에 가서 선생님이 오늘 ‘방귀를 뀌셨다.‘며 신나게 떠들 모습이 상상되어 아찔했지만 일단 즐거우니 되었다. 이 정도면 ‘짱구는 못 말려’가 아니라 ‘선생님 똥 얘기는 못 말려’가 아닐까.
개그맨 신동엽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야설 실력으로 인정받는다. 상대방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을 정도로 내 관심사를 재치 있게 이야기를 하는 능력이 탐난다. 그게 바로 나오는 게 아니고 꽤 많은 연구와 시도를 거쳐서 생긴 입담이라는 인터뷰를 봤다. 나도 좀 더 다양한 시도와 실패와 연구를 거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러서지 않겠다. 얘들아 기다려. 내가 똥 이야기의 신동엽이 되어 우리 서로 즐거울 날이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