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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Jun 16. 2024

완두콩으로 삼행시를 지어보겠어요


완, 연한 여름이 오기 전에

두, 두둑 장맛비가 떨어지기 전에

콩, 콩콩 분주하게 시장 바닥을 뒤지고 다녔지요



  유월은 일 년 중에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가장 분주한 때다. 완두콩, 산딸기, 오디, 마늘종, 햇감자. 발음만 해보아도 싱그러운 초여름의 열매들을 성실하게 입속으로 거둬들일 때다. 지난주 주말에는 작정하고 현금을 두둑이 뽑아 집 주변 시장을 찾았다. 지난봄에 나물이 한창일 때 천 원짜리 두 장이 부족해서 떨이하는 냉이 한 무더기를 놓친 가슴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는 현금을 준비하는 자가 굴러 들어오는 복을 받기 마련이라는 걸 배웠다. 유월의 과일과 채소가 쏟아지고 그만큼 가격이 떨어질 때였다. 시장 플랙스를 실컷 할 수 있는 계절. 어깨춤을 추며 마트에서 받은 빨간 바퀴가 달린 시장바구니를 끌고 비장하게 움직였다.


 단호박이 한 통에 천 원이라니 무거워도 얼른 주워 담았다. 아직 시큼한 천도복숭아는 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 한 바구니 샀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쪄서 설탕에 찍어 먹을 생각에 눈이 멀어 감자 한 바구니가 추가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이 구역의 큰 손이었다. 선글라스도 끼고 껌이라도 씹어야 구색이 맞을 것 같았다. 언제 봐도 신기한 뽕나무 열매 오디도 영롱한 보랏빛으로 나를 유혹했다. 거무튀튀한 애벌레 같이 생겼지만 막상 톡톡 씹어먹으면 입안에 퍼지는 은은한 단맛이 떠올라 군침이 돋았다. 사치일까 싶어 가게 주변을 몇 번 맴돌다가 일 년에 딱 이 주만 나온다는 아주머니의 한정판 마케팅에 넘어가주었다. 학창 시절 여름 방학에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사촌 오빠들에게만 오디를 갈아주었다. 요구르트와 오디를 한데 넣고 간 주스가 맛있어 보일 나이는 아니었지만 오빠들만 주니까 괘씸해서 더 탐났다. 결국 오디도 한 팩 산 건 다 할머니 때문이다.


  "오디로 갔나 오디로 갔나 오디로~ 오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실없는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초여름으로 가득한 끌차는 땀이 뻘뻘 나도록 무거웠지만 한없이 가벼웠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오디를 씻어 싱크대에 앞에 선 채로 혓바닥이 검어지도록 쪽쪽 빨아먹었다. 역시 민숭민숭한 단맛이 퍽 맘에 들었다. 할머니, 내가 유월마다 오디 꼭 챙겨 먹을게요. 혹시 하늘나라에서 뒤돌아보니 미안하시거든 걱정 마세요.


  어제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디저트로 케이크 대신 산딸기를 한 박스를 사서 갔다. 친구 집에 가기 전 날 평소에 자주 들리는 믿음직한 과일 가게에서 산딸기가 붉고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냉동실에 스티로폼 박스 채로 넣어두었다가 조심히 꺼내 들었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계단에서 산딸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질까 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친구 집 근처에서 요거트도 하나 샀다. 요거트에 산딸기를 넣어 번거롭고 사치스러운 디저트를 먹었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산딸기의 맛을 벗과 함께 음미하는 낭만을 즐기고 있자니 팔자 좋은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오늘의 낭만은 완두콩이었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도착해  밥솥을 열었더니 녹색 완두콩이 잔뜩 박혀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완두콩의 단맛이 이렇게나 매력적이었던가. 요즘 해마다 입맛이 변하는데 올여름엔 완두콩이 내게 오려나 싶었다. 완두콩을 듬뿍 넣은 밥을 여름 내내 먹고 싶어졌다. 겨울나기를 위해 도토리를 모아두는 다람쥐처럼 나는 한 여름 나기를 위해 냉동실에 완두콩을 쌓아두기로 했다. 오늘도 시장으로 향했다.



  까놓은 완두콩이 작은 바구니에 오천 원인데 양이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여름 내내 완두콩 밥을 먹기로 결심하지 않았는가. 완두콩은 초록색 망에 채워 '관'이라는 단위로 팔고 한 관은 사 킬로가 조금 안 되었다. 오늘의 완두콩 시세는 한 관당 만 오천 원 정도 되었다. 이게 싼 건지 비싼 건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통 크게 만 오천 원치 완두콩을 샀다. 한 관의 완두콩을 쟁반에 펼쳐놓으니 양이 더 많아 보였다. 완두콩으로 키즈카페에 있는 볼풀장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밥만 해 먹어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검색해 보니 완두콩 수프나 완두콩 빵 레시피도 있었다. '완두콩 수프는 얼마나 고소할까? 완두콩 빵을 만들 땐 꿀을 듬뿍 넣어 달달하게 먹어야지.' 점점 일이 커지고 있었다. 완두콩 밥도 해 먹고 수프도 해 먹고 빵도 해 먹다 보면 점점 길고 더워지는 여름도 금세 끝나있을 것 같은 기분. 행복한 상상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은 싱싱할 때 꼬투리를 까서 얼려놓는 작업이 먼저였다. 식구들을 불러 도와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딸,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을 거야?"

"밥도 하고 수프도 하고 빵도 할 거야. 같이 까주면 엄마도 얻어먹게 해 줄게!"

"와~ 우리 딸 덕분에 맛있는 거 먹겠다. 같이 하면 금방 하지!“


  일을 벌이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는데 엄마의 응원을 받으니 힘이 났다. 완도콩 까기는 초여름날의 느슨한 오후에 함께하기 딱 좋은 소일거리였다. 식사할 때 말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사부작거리는 모습이 오랜만이었다. 대학교 졸업반인 막내 동생은 취업하면 머리 파마부터 강렬하게 할 거라고 했다. 엄마는 요즘 빠진 주말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안 이쁘다고 했다. 재잘거리며 일하니 꼬투리를 까는 손이 점점 느려졌지만 오히려 좋았다. 요거트에 산딸기를 넣어 일꾼들의 새참으로 제공하며 유세를 떨었다. 욕심내서 완두콩 잔뜩 사 온 게 잘했다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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